국내 독립운동사, 불교, 문학 쪽에서 주로 접근했던 ‘萬海 한용운’ 연구를 좀 더 넓은 틀, 현대 서구사상의 지평에서 분석한다면 어떤 결론이 나올까. 지난 26일 만해학회(회장 한계전)가 ‘만해사상의 현대적 지평’이란 주제로 제13회 만해학술세미나를 연 것은 이와 관련된다. 이날 세미나에서는 「만해 사상과 현대사조」(김광식, 동국대), 「하이데거와 만해」(이승훈, 한양대 명예교수), 「탈식민주의자로서 만해 한용운의 사상 읽기」(이도흠, 한양대), 「라깡의 정신분석으로 본 만해」(김종주 신경정신과 전문의, 라깡분석치료연구소장), 「들뢰즈와 만해의 님의 침묵」(전형철, 서울여대), 「서구 초현실주의 시와 만해의 시」(백원기, 동방대학원대학), 「만해와 간디」(김종인, 경희대) 등의 논문이 발표됐다.
모두 ‘서구사상’이란 지평에서 만해를 새롭게 읽어내려는 시도였다. 만해학회 학술세미나에서 특히 눈길을 끈 것은 김종주 신경정신과 전문의의 발표였다. 그는 라깡이 1970년대 초에 보로메오 매듭을 이용해 자신의 분석이론의 본질적 측면들을 재구성했던 데서 ‘증상과 무의식과 과학’을 빌려 만해 시를 새롭게 보고자 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이러한 시각을 만해의 『조선불교유신론』에까지 확장해 적용할 수 있다고 말했다. 라깡의 보로메오 매듭에서 그가 찾아낸 것은 의외로 단순하다. “증상과 무의식과 과학이 정신의 세 가지 영역에 관여되듯 만해의 정신적 표상을 이루는 정치와 종교와 문학도 역시 서로 간여하고 서로 침투되는 영역들로 이해해볼 수 있다.
심리적인 현상들은 실재계·상징계·상상계의 보로메오 매듭 그 자체에 의해 만들어지고 바로 그 지점들에서 각각의 영역들이 서로 접촉하게 된다”는 것. 그가 여기서 눈여겨보는 것은 ‘감각적인 반응’이 아닌 ‘반응이 불러오는 관념들’이다. “연꽃 같은 발꿈치로 갓이 없는 바다를 밟고, 옥 같은 손으로 끝없는 하늘을 만지면서, 떨어지는 날을 곱게 단장하는 저녁놀은 누구의 시입니까”(「알 수 없어요」의 제5행)를 인용하면서 그는 “실재계·상징계·상상계라는 세 고리로 재구성해보면 또 다른 맛을 느낄 수 있다”라고 말한다. 그는 여기서 “갓이 없는 바다와 끝없는 하늘이라 해서 수평과 수직으로 무한히 전개돼 있는 공간” “그것도 저녁놀이 꽉 들어찬 삼차원의 공간”을 발견한다.
또한 저녁놀이 펼쳐지는 공간은 ‘곱게 단장하기’ 이전의 공간을 환기하는데, 이 광대무변한 공간은 아무런 틈새도 없고 안팎의 구분도 없는 미분화된 상태에 있다. “이것이 바로 실재계이다. 여기에 시인의 말로 단장된 작품이 저녁놀로 나타났던 것이다. 카오스로부터 말씀에 의해 이 세계가 생겨났듯이 상징계에 의해 실재계로부터 작품이 형성돼 나온다.” 『조선불교유신론』 역시 같은 접근법으로 읽어낼 수 있다는 게 김종주 전문의의 주장이다. 시 해석과 달리, 사상적 체계화가 이뤄진 논설이라 다른 연구자들의 비판도 충분히 예상되는 부분이다.
거칠게 정리한다면, 그는 이 저술이 어떤 ‘증상’을 내보이는 동시에 ‘충동’에 의한 저술이라고 주장한다. 상징계를 잠식해 들어가는 증상(남근적 향락이 존재하는 기형적 돌출), 그리고 실재계에 부착돼 있던 기생적 향락(라깡은 이를 ‘고통스러운 쾌락’으로 본다)이 실재계로부터 튀어나와 커다란 강물의 입구에 펼쳐져 있는 형국이라는 설명이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한 연구자의 시각을 동어반복한 것 아니냐는 비판을 피해갈 수 없다. 그 스스로 인용했던 대목, 『한용운-사랑과 혁명의 아우라』(최동호)에서 최동호가 이미 말했던 “그의 마음 속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는 혁명적 실천가로서 행동주의가 외적 억압으로 인해 좌절될 때, 그 혁명적 의미를 표현하는 우회적 방법으로서의 시 쓰기”로 되돌아오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의 접근에는 라깡의 정신분석은 있지만 ‘새로운’ 해석과 평가는 찾아보기 어렵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