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25 07:35 (목)
세 장의 그림에서 읽어낸 혁명 … 저자의 ‘개념’ 뚜렷하지 않다
세 장의 그림에서 읽어낸 혁명 … 저자의 ‘개념’ 뚜렷하지 않다
  • 김재호 학술객원기자
  • 승인 2013.07.06 19:0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리뷰_ 『대중의 역사―세 번의 혁명 1789, 1889, 1989』 스테판 욘손 지음|양진비 옮김|그린비|304쪽 ┃ 17,000원

 

▲ 제임스 엔소르가 그린 「1889년 브뤼셀에 입성하는 그리스도」. 책의 저자는 이 그림에서 대중과 광기를 읽어냈다.

대중의 역사는 과연 존재할까. 이 물음 전에 대중의 의미부터 파악할 필요가 있다. 『대중의 역사』(스테판 욘손 지음, 양진비 옮김, 그린비)는 폭도·대중·인민·군중·다중으로 이어지는 대중의 계보학을 보여준다. 저자는 스웨덴 린셰핑 대학 이주·민족·사회문제연구소 민족학 분야 교수다. 그는 1789, 1889, 1989 세 번의 혁명을 통해 나타난 대중의 역사를 고찰한다. 정확히 말하자면, 1789년 프랑스 혁명, 1871년 파리코뮌, 1968년 68운동이지만 저자는 그림 속 혁명에 주목한다.

혁명의 이미지화는 왜 위험한가
1789년 6월 20일, 베르사유 왕궁 바깥에서 프랑스 혁명을 알리는 선언을 맹세한다. 이 순간을 자크 루이 다비드는 「테니스코트의 서약」(다비드는 이 작품을 1791년에 시작했지만, 미완성으로 남아야 했다. 화폭의 주인공들이 단두대에서 사라졌기 때문이다)으로 포착한다. 그림 중앙에는 과학자 장 실뱅 바이이가 서 있다. 엄숙한 선서 뒤에 약 600명의 다른 대표자들이 따른다.

혁명을 도상학(혹은 도상해석학)의 관점에서 이미지화하는 것은 위험하다. 혁명은 고정적이지 않고, 혁명의 주체 역시 소수일 수 없기 때문이다. 혁명을 이끌어가는 대중 역시 고정되는 순간 보수적이면서 동시 진보적이게 된다. 미국의 대통령 존 애덤스는 민주주의가 상징들 없이 이뤄져야 한다고 적었다. 상징화되는 순간, 배제되는 다수가 발생할 수 있다. 소수가 大義로, 다수가 少義가 되는 것이다. 이렇기 때문에 저자는 “사건으로서의 인민은 순간적”이라며, “아마도, 민주주의의 주요한 장면은 재현에 전적으로 저항할 것”이라고 적었다. 대중의 정형화가 시작되는 것을 알려준 것은 통계학이었다.

과학자 뷔퐁의 ‘윤리적 산수’와 수학자 콩도세르의 ‘사회적 수학’은 사회적 요인들의 관계를 포착하려 한다. 그 가운데 인구통계학 창시자인 크틀레에 의해 대중은 평균인으로 이미지화되고, ‘모든 개인들이 통계적으로 분산’돼 간다. 대중을 뜻하는 ‘mass’는 정량화할 수 없는 많은 양을 가리키는 개념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보들레르의 표현을 빌리자면 “모두는 수이다.

수는 모두 안에 있다. 수는 개인 안에 있다. 황홀경은 수”이다. 저자에 따르면 “‘대중’은 생각할 수 있는 모든 방향으로 구부러지고 잡아 늘여진 단어”이며, 양과 수, 인구 통계, 가난과 궁핍, 노동운동, 병리적 요소, 바보들의 무리 등의 관점에서 정의된다. 다음으로 주목할 부분은 바로 대중심리학이다. 1889년의 제임스 엔소르의 「1889년 브뤼셀에 입성하는 그리스도」는 대중과 광기다. 이 그림은 대중심리학에 따라, 집단적인 망상에 휩싸인 군중을 묘사한다고 평가된다. 귀스타브 르봉에 따르면, 대중의 행동은 정신적 병리에 의해 발생한다. 망상은 집단적이고, 정신적 감염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저자는 더 면밀하게 들여다봐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 안에는 각각 다른 시점이 포위돼 있고, “사회극의 서로 다른 측면을 반영한다는 것”이다. 엔소르의 가면은 감춰진 사회적 현실을 드러내는 상징이다.

이 때문에 저자는 “엔소르의 묘사는 재현과 권력의 체계, 즉 전체 사회가 어떻게 재현돼야 하는지를 결정하는 미학적인 체계뿐 아니라 시회가 누구에 의해 대표돼야 하는지를 결정하는 정치적인 체계 모두에 합선을 일으킨다”고 강조한다. 이 그림이 그렇게 중요한 이유는, “벨기에 사회와 문화를 분열시켰던 사실상 모든 갈등의 계보들을 압축하고 있다는 점” 때문이다.

이제 막 행동하려는 인민의 모습도 담겨 있다. 저자가 마지막으로 주목하는 것은 1989년의 알프레도 자르의 설치미술품 「그들은 너무도 사랑했다, 혁명을」이다. 옮긴이 양진비의 표현에 따르면, 이 그림은 재현의 ‘틀’ 자체 혹은 경계에 관한 문제를 다루고 있다. 그림은 68혁명을 재구성하고자 한다. 왜 68혁명이 유발될 수밖에 없었는지 그 구성의 힘을 작가는 표현하고자 했다. 그것은 ‘질서의 무질서’로 표현된다.

광기와 대중심리학
시대는 변했고, 대중의 양상도 바뀌었다. 혁명을 꿈꾸는 대중은 이젠 주권과 영토에 따른 난민 문제, 세계화와 자본의 문제, 집단학살의 문제 등으로 확장된다. 자르의 미술은 이러한 문제들을 규정짓는 틀의 경계를 해체하면서 새로운 틀을 보여준다. 범죄자로 낙인찍힌 호모 사케르 혹은 소외되고 사냥 당해야 하는 존재로서의 ‘늑대 인간’(나치가 억압하려 했던 유대인, 집시, 동성애자, 공산주의자, 장애인들 등을 지칭하는 이 용어는 현대적 의미로 재해석 해볼 수 있을 것이다)은 새로운 틀에서 다른 사회질서를 꿈꿀 수 있다.

책은 에드먼드 버크의 『프랑스 혁명에 관한 성찰』에 나타난 ‘돼지 같은 다중’부터, 칼라일의 『프랑스 혁명』의 신성하고 원시적이며 집단적 힘으로서의 ‘일반 사람들’, 『레미제라블』의 ‘비참한 사람들’, 하트와 네그리가 『다중』에서 제기한 열려 있고, 가지각색이며, 무한한 ‘다중’까지 무수한 대중의 역사를 다룬다. 하지만, 정작 저자가 지향하는 대중의 개념은 무엇인지는 뚜렷하지 않다. 수많은 이론 속에서 정치철학과 혁명사에 관심 있는 사람들은 흥미로울 수 있다. 허나, 그 이론들이 궁극적으로 보여주고자 한 바가 무엇인지 뚜렷하지 않아 생각이 어지러울 따름이다. 마지막 장에서 결국 저자는 인민이란 불가사의한 것이라고 결론짓는다. 후기에서 언급했듯이, 대중은 결국 사회적 사실이라기보다는 이데올로기의 테마로 이해해야 할지 모른다.

김재호 학술객원기자 kimyital@empas.com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