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20 15:40 (토)
새내기 박사의 고민 … 획하나 모자라면 어떤가
새내기 박사의 고민 … 획하나 모자라면 어떤가
  • 권순경 연세대 박사후 연구원
  • 승인 2013.06.17 13:2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학문후속세대의 시선_ 권순경 연세대 박사후 연구원

권순경 연세대 박사후 연구원
아직 박사라고 불리는 것이 익숙지 않은 새내기 박사인 나는 졸업을 앞두고 편안한 마음보다 걱정스런 마음이 더욱 앞섰다. 내가 과연 박사학위를 받을 자격이 되는가에 대한 두려움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학교에서 정해놓은 졸업요건인 SCI저널의 논문발표나 졸업 시험, 그리고 대망의 학위논문심사 통과와 같은 형식적인 ‘자격’이 아닌 스스로가 느끼는 양심적인 ‘자격’이었다.

학위 기간의 오랜 부분을 정부출연연구소에서 보내며 학생보다 박사님들이 더 많은 실험실에서 생활하면서, 연구에 많은 조언을 해주시던 박사님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아직 학생이라서 괜찮다”는 변명이 통하지 않는 독립된 연구자의 모습과 부족한 내 모습 사이에 괴리감이 느껴졌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누가 말했던가, 초반에 가졌던 오만함은 사라지고 학위 논문은 읽으면 읽을수록 허점이 보이고 공부를 하면 할수록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내 마음은 내 지식의 빈약함에 초조해져 갔다. 아니나 다를까 어느새 세상은 ‘융합’이 미덕인 사회가 됐다. 과학기술 분야에서 BT, IT, NT를 접합한 생소한 이름의 학문까지 등장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예전보다 학위기간은 짧아지고 배워야 할 지식은 배가 됐다.

생명공학과 학부를 졸업하고, 대학원에 진학하면서 내가 선택했던 연구 대상은 미생물이었다. 미생물은 산업적 쓰임이 많고, 그 종류도 다양해 연구의 유연성이 높다. 이런저런 변덕을 자주 부리는 내 취향에는 말 그대로 딱인 연구 분야이다. 급변하는 사회 분위기처럼 내가 전공하는 미생물유전체학 분야도 학위를 하는 동안 큰 패러다임의 변화가 있었다.

여전히 특정 타깃을 정하고 깊이 있는 연구를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전통적인 한 개체를 연구하는 것을 뛰어넘어 이제는 생물학적 데이터를 서로 중첩시켜 총괄적 네트워크 전체를 대상으로 통합적으로 이해해야 하는 시스템생물학적 접근방법을 가지고 연구하고 응용해야 하는 시점에 이르렀다.

또 유전체 해독기술의 발달로 한 개체가 아니라 생물집단을 아우르는 거시적인 관점에서도 연구해야 하는 시대가 도래했다. 기존 분자생물학적 지식에 기반을 둔 실험도 능숙하게 해야 하고, 한 때 원수처럼 느껴졌던 수학과 통계학도 제대로 공부해야 하며, 하물며 이제 많은 생물 전공 학도들은 빅데이터를 다루기 위한 소프트웨어 활용 내지 개발 능력도 갖추어야 한다.

몇 해 전 아시아의 젊은 과학도들이 주축이 된 학회에 참석했을 때 일이다. 초청된 교수님이 젊은 과학도들이 갖추어야 할 인재상에 대해서 언급한 내용이 기억에 남는다. 아이(I)형 인재가 특정 분야에 대한 지식과 경험을 갖춘 인재상이라면, 티(T)형 인재는 특정 분야의 전문가적 자질을 갖춤은 물론 폭넓은 교양을 지닌 인재. 횡적으로 두루 알고 종적으로 한 분야를 깊이 아는 인재형을 의미한다.

하지만 지금의 시대가 궁극적으로 추구해야 할 인재상은 파이(π)형 인재로 이는 T형 인재에서 한 단계 발전된 개념으로 2가지 이상 분야의 전문가적 자질을 갖추면서도 폭넓은 교양을 지닌 인재상이다. 교수님의 개인적인 발상이 아닌 꽤 일반화된 이야기임에 실망감도 있었으나, I자로 시작해 획을 하나하나 추가해가며 열정적으로 파이(π)형 인재의 필요성을 강조하시던 강연을 들으며 앞으로 먹고 살기 정말 힘들겠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된 것도 사실이다. 다방면을 넘나들며 융합할 줄 알아야 하고 그에 필요한 생각의 능력을 키워야 한다니 티(T)형 인재도 먼 이야기 같은데, 파이(π)형 인재라. 한 분야 공부하기도 힘든데 두발이가 되고 세발이가 되는 건 더더욱 힘들지 않은가. 발목에 천근만근 추를 단 느낌이었다.

학문을 하는 사람들 입장에서 두 가지 이상에 정통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어떻게 보면 사실상 불가능한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어쩌면 자신의 주력 분야를 벗어나 다양한 학문을 받아들이는 열린 마음을 갖는 학문적 통섭의 자세를 갖추는 것이 과학 분야에서 파이(π)형 인재를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 빠르게 변화하고 많은 연구결과가 쏟아지는 요즘,  지적인 빈약함에 불안감을 느끼는 것은 비단 나만의 고민이 아니라 융합학문의 시대를 살아가는 많은 학생들이 가지고 있는 공통된 고민이기도 할 것이다.

한편으로는 이제 겨우 박사라는 자격증 하나 받고 출발점에 서서 너무 거창한 기우를 하고 있는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다변적인 생각의 틀을 가지고 부담 없이 많은 경험을 해볼 수 있는 것이야 말로 배움의 길에 있는 학생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 아닐까 한다. 이런 시기가 지나가 버린 것에 대한 아쉬움이 졸업을 앞두고 있었던 나에게 불안감으로 나타난 것일 수도 있겠다. 어떤 목표를 위해 열정을 갖고 그것을 불사르는 경험은 어떤 경우든 헛된 것이 아니다. 어느 순간 그 경험이 어떻게 쓰일 수 있다는 걸 명심하고 이것이 융합형 인재가 될 수 있는 최소한의 경험을 쌓는 일이라는 위안을 가지고 조급해 하지 말자. 획하나 모자라면 어떤가, 긋는 방법은 배웠으니 이제 천천히 그어 나가면 된다.

권순경 연세대 박사후 연구원
과학기술연합대학원대학교(UST)에서 박사학위를 하고, 현재 연세대에서 박사 후 연구원으로 미생물유전체 관련 연구를 하고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