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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도시이면서도 속은 텅텅 빈 폐허의 공간 … 필름은 왜 이곳을 주목했을까?
대도시이면서도 속은 텅텅 빈 폐허의 공간 … 필름은 왜 이곳을 주목했을까?
  • 교수신문
  • 승인 2013.06.03 1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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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의 공간, 영화 속 인천의 이미지들
장산곶매’가 「오! 꿈의 나라」(1989)에 이어 두 번째 작품으로 「파업전야」(1990)를 선보인 것은 의미심장하다. 그것은 영화가 재현해 내는 ‘공간성’의 의미 차원에서 그렇다. 「오! 꿈의 나라」가 광주에서 벌어졌던 민주화 항쟁을 그려낸 것이라면, 「파업전야」는 인천 남동 공단을 배경으로 한 노동조합의 결성 과정을 재현해 내고 있다. 앞의 것이 ‘광주’라는 공간을 통해 ‘민족’을 소구하는 것이라면 뒤의 것은 ‘인천’ 공간에서 ‘계급’의 함의를 읽어내고 있는 것이다.

 

인천은 「파업전야」에 의해 정치적 공간 또는 거대담론의 장 속으로 소환돼 재해석된다. 이 영화는 공단 도시로서의 인천의 정체성을 직설화법으로 풀어나가고 있다. 이때 인천의 남동 공단이라는 공간은, 앙리 르페브르의 견해에 기대면, “생산물이자 생산자이고, 경제적 관계, 사회적 관계의 토대”가 된다.

어떤 의미에서 「파업전야」는 1980년대 거대담론의 역사 끝머리를 장식하는 마지막 불꽃같은 것이었다. 「파업전야」 이후 영화나 TV 드라마 속의 인천은 더 이상 첨예한 정치성을 추구하지 않는다. 2000년대에 접어들면서 바야흐로 인천은 거대담론의 담론장에서 걸어 나와 마이너리티의 권역으로 흘러 들어간다. 「파이란」(2001)과 「고양이를 부탁해」(2001), 그리고 「슈퍼스타 감사용」(2004), 「비상」(2006), 「천하장사 마돈나」(2006) 등이 그것이다. 3류 깡패 강재(최민식 분), 성장통을 겪는 다섯 명의 여상 졸업생들, 프로야구 통산 최대 연패의 주인공 투수 감사용(이범수 분), 무명들로 이뤄진 인천 유나이티드 프로 축구 선수들, 그리고 여자가 되고 싶어 하는 남자고등학교 씨름 선수 오동구(류덕환 분) 등은 인천 공간의 어떤 결핍 지점들을 가리키고 있다.

이 영화들은 주류에서 벗어나거나 정상에 오르지 못하는 마이너리티들의 삶을 조망한다. 「파이란」에서 강재가 비굴한 발걸음을 옮기고 있는 인천항과 자유공원 밑 북성동 주변은 이 영화의 또 하나의 주인공이다. 「고양이를 부탁해」의 만석동, 만석부두, 차이나타운, 연안부두 터미널 등의 공간성은 극중 인물들이 처한 상황에 대한 강력한 알레고리로 작동하고 있다. 다큐멘터리 영화 「비상」은 어떠한가. 마치 외인부대원들처럼 무명 선수들로만 구성된 인천 유나이티드 축구단은 이렇다 할 명성도 경력도 갖추지 못한 선수들의 모임이다.

▲ 영화「파이란」포스터. 이 영화의 주인공인 강재가 비굴한 발걸음을 옮기고 있는 인천항과 자유공원 밑 북성동 주변 역시 이 영화의 또 하나의 주인공이다. 인천(항)은 이렇게 아스라한 속도의 배경이 되고 말았다.

「슈퍼스타 감사용」에서 주인공 감사용이 던지는 야구공은 과녁에 정확하게 도달하기도 전에 상대편의 방망이질에 난타 당한다. 영화 속 주인공들은 2류, 또는 3류 인생을 살면서 누추한 공간을 배회한다. 2010년대를 넘어서면서 인천 공간은 한국 영화와 TV 드라마에서 인기 있는 촬영지로 각광을 받게 된다. 이 시기의 영화와 드라마들은 인천의 錯綜性, 즉 근대건축물과 빈민촌과 차이나타운과 국제신도시가 어지럽게 공존하고 있는 공간의 숨결을 포착해 낸다. 인천의 금창동과 신흥동 부근에서 찍은 「도가니」(2011), 서구 가정동과 영종도 공항 북로 일대에서 촬영한 「통증」(2011), 인천 테크노파크 IT센터에서 로케한 「더 타워」(2012) 등이 그 예가 될 것이다.

「신세계」(2012)는 인천국제공항, 인천항, 제물포 시장, 연안부투, 차이나타운 등에서 촬영했고, 「남자사용설명서」(2012)는 중구의 자유공원 및 홍예문, 그리고 아트플랫폼 등지에서 찍었다. 바야흐로 인천이 영화 촬영지의 적격지로 주목받는 상황이다. 그런데 도심재생사업구역인 루원시티(Lu 1 City)에서 촬영한 영화들이 많다는 점은 주목을 요한다. 인천 서구 지역 재개발 사업의 차질 때문에 건물 철거가 지연되면서 유령 도시가 돼버린 루원시티 현장은 촬영 현장으로 관심을 받았다.

주민들이 모두 이주해 버린 가정동 일대는 폐가들만이 남아있어 폭파 장면 촬영이나 범죄 사건을 재현하기에는 적격이었기 때문이다. 「카운트다운」(2011), 「모비딕」(2011), 「도둑들」(2012), 「나는 살인범이다」(2012) 등의 영화들과 KBS 2 드라마 「강력반」(2011)이 루원시티에서 촬영된 것도 그러한 사정에서였다. 신도시 재생사업이라는 도시 근대화가 지연된 후 음산하고 누추한 공간으로 몰락해 버린 루원시티가 음울한 표정으로 카메라에 포착된다. 인천 공간은 「친구」나 「해운대」의 부산 공간이 지니는 짙은 지방색과 향토성을 지니지는 못한다. 그보다는 대도시이면서도 속은 텅텅 빈 폐허의 공간으로서, 그리고 문명의 풍요로운 이미지보다는 결핍과 야만성의 아이콘으로 재현되곤 했다.

이와는 달리 MBC 드라마 「로얄 패밀리」(2011)는 인천 송도 국제도시의 잭니클라우스 골프장과 포스코 건설 송도 사옥을 주요 배경으로 삼았고, KBS 2 드라마 「드림하이」(2011)는 인천 해안동의 인천아트플랫폼을 배경으로 했다. 영화 「더 타워」는 인천 테크노파크 IT센터에서 촬영했다. 이들 작품들은 국제 도시 인천의 어두운 풍광들을 카메라에 담지 않고 현대적인 건축물과 예술적인 분위기가 풍기는 장소를 포착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얄 패밀리」와 「더 타워」는 화려한 경관 속에서 벌어지는 암투와 재난을 재현하고 있다.

말하자면 인천 공간은 웬만해서는 로맨틱하고 따뜻한 공간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것이다. 충무로에게 인천 공간은 지나치게 누추하거나 허접하고 냉혹하면서 부조리하게 받아들여졌다. 쓸쓸한 항구와 낡은 골목길, 차이나타운과 일제 강점기 시대의 근대 건축물, 폐허가 된 동네와 글로벌한 최첨단 국제 도시. 영화 속에서, 인천은 ‘비동시적 동시성’이라는 심한 분열증으로 균열되고 있다. 충무로가 발명한 인천 공간이란, 육지도 아닌 그렇다고 바다도 아닌 항구도시로서의 문지방 공간 혹은 경계 공간이었던 것이다.

 


박명진 중앙대·국어국문학과
인천에 나고 자란 필자는 중앙대에서 박사를 했다. 동아일보 신춘문예 영화평론으로 등단했다. 저서로는 『한국희곡의 이데올로기』, 『욕망하는 영화기계』 등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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