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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토에서 보낸 여름
교토에서 보낸 여름
  • 한상언 한양대 연극영화과 강의교수
  • 승인 2013.05.27 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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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후속세대의 시선_ 한상언 한양대 연극영화과 강의교수

 

한상언 한양대 연극영화과 강의교수

1933년 <신동아> 5월호에는 ‘꽃이 피는 계절이면 생각나는 사람, 가보고 싶은 곳’이라는 주제로 여러 문인들의 글이 실렸다. 한때 교토의 니카츠(日活) 타이쇼군촬영소(大將軍撮影所)에서 연구생으로 있었던 심훈은 교토 외곽의 시타노모리(下ノ森)로 로케이션을 떠났던 어느 날을 영화의 한 장면처럼 묘사했다. 화창한 햇살을 받은 앞산에는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고 작은 물고기가 헤엄치는 냇물 위로 벚꽃이 눈처럼 내리는 가운데 배우들의 종달새 같은 노랫소리가 퍼졌던 그날의 풍경은 영화를 배우러 온 식민지 출신 청년에게는 두고두고 잊히지 않는 봄의 정경이었으리라.

교토의 봄을 추억했던 심훈과는 달리 내게 교토는 여름의 따가운 햇볕으로 기억된다. 박사 후 국외연수를 위해 교토에 도착한 2011년 6월 어느 날, 무엇에 홀렸는지 숙소를 코앞에 두고 3시간 동안이나 거리를 헤맸다. 뜨거운 태양 아래 벌겋게 익은 얼굴로 무거운 짐을 끌고 다니다 힘들게 찾은 숙소 앞에 섰을 때의 기분이란, 등을 뉘일 수 있는 곳을 찾았다는 안도감과 집을 바로 앞에 두고 찾지 못했다는 허탈감 그리고 교토의 여름을 어떻게 보낼지에 대한 뒤늦은 걱정 같은 것이었다.

연수를 하게 된 리츠메이칸대학(立命館大學) 기누가사(衣笠)캠퍼스는 자전거로 10분 남짓이면 도착할 수 있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하지만 자전거가 없던 나는 여름 내내 산책을 겸해 그곳까지 걸어 다녔다.
역사의 도시 교토의 거리를 걷는 것은 교토를 제대로 보고, 느낄 수 있는 시간이겠지만 이는 봄이나 가을처럼 기후가 온화할 때 해당하는 이야기이다. 여름의 뜨거운 햇볕아래에서나 차가운 겨울바람을 맞으며 교토의 거리를 걷는 것은 쉽지 않기 때문에 여름 내내 해가 달아오르기 전에 집을 나서 해가 저물 때 쯤 돌아오는 것이 일상이었다.

관광객이 많지 않은 시각, 기타노텐만구(北野天?宮)와 헤이노신사(平野神社)를 지나는 신록이 우거진 통학로는 고즈넉한 운치가 있어 좋았다. 어스름해질 쯤 기타노텐만구 우측의 소로에는 홍등이 걸린 작은 술집들이 늘어서 이채를 띠었는데, 카미시치켄(上七軒)이라는 이 거리는 교토에서 가장 오래된 하나마치(花街)였다.

게이샤와 마이코의 발상지로 유명한 이런 고풍스런 거리도 좋지만, 교토에 건너온 조선영화인들의 숨결을 느낄 수 있었던 타이쇼군(大將軍)신사야 말로 그해 여름의 가장 기억에 남는 장소였다. 7월 어느 날, 지도교수인 토미타 미카(?田美香) 교수의 안내로 니시진(西陣)과 우즈마사(太秦) 지역에 있었던 과거 영화촬영소 자리를 탐방했다. 땀을 뻘뻘 흘리며 찾은 타이쇼군신사는 이미 몇 번이나 그 앞을 지나갔음에도 그곳이 신사임을 전혀 눈치 채지 못했을 정도로 작고 평범한 곳이었다. 경내를 둘러보는데 불과 몇 분밖에 걸리지 않는 그곳에서 토미타 교수는 혼자만 아는 비밀을 공유한다는 표정으로 석물에 새겨진 일본 영화계의 중요 인물들의 이름을 하나씩 설명해주었다. 그것은 한때 이 주변이 일본영화의 중심지였음을 보여주는 증거였다.

자연스레 그곳에서 일했을 조선인 청년들이 생각났다. 영화를 배우기 위해 혹은 영화인이 되기 위해 많은 조선청년들이 교토를 찾았다. 지금은 모두 사라졌지만, 타이쇼군신사에서 불과 100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있었던 타이쇼군촬영소에는 이시이 테루오(石井輝男)라는 일본식 이름으로 배우 강홍식이 활약했고, 철필구락부 사건으로 <동아일보>에서 해직된 심훈이 연구생으로 있었다. 한 블록 건너의 도아키네마(東?キネマ) 도지인촬영소(等持院撮影所)에서는 박기채와 양세웅이 영화연출과 촬영을 배우고 있었다. 신사를 둘러보고 나오면서, 조선으로 돌아가 함께 영화를 만들 것을 고민하던 이들 조선청년들의 모습을 상상해보았다. 순간 주변의 작은 것 하나 하나가 허투루 보이지 않았다.

이후 가끔씩 산책하듯 이곳을 찾았다. 지금은 주택가로 변한 거리를 유명, 무명의 조선인 청년들이 바쁘게 오갔을 것을 생각하니 경건한 마음에 이전보다 주변을 유심히 살피게 되었음은 물론이다. 돌이켜 보건데 이곳을 종종 찾았던 것은 숙소와 가까웠던 이유 말고도 책을 통해서 배울 수 없는 당시의 분위기를, 불어오는 바람과 개울의 물소리와 같은 풍경과 소리를 통해 느끼고 싶었던데 있었던 것 같다. 조선인 청년들의 흔적을 떠올리게 했던 그날의 여름을 추억하다보니 교토에서의 연수가 긴 시간을 두고 이어져 있는 어떤 인연을 찾아 떠난 여행이란 생각이 든다.

한상언 한양대 연극영화과 강의교수
한양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후 일본 리츠메이칸대에서 포스닥 과정을 마쳤다. 현재 한양대에서 한국영화사를 강의하고 있으며 일제강점기 한국영화에 관한 연구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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