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哲人 황제의 '명상'속에서 번뇌의 풍진을 만나다
哲人 황제의 '명상'속에서 번뇌의 풍진을 만나다
  • 최재목 영남대ㆍ철학과 교수
  • 승인 2013.05.27 11:0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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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목의 유랑·상상·인문학 38 로마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원기둥’을 바라보며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원기둥.

콜론나 광장에 있는, 로마제국의 제16대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121~180)의 원기둥 앞에 선다. 높이 42미터. 독일 원정 기념으로 세운 원기둥엔 전쟁 장면들로 가득하다.

물끄러미 기둥 끝을 쳐다보니 아우렐리우스의 말이 떠오른다. ‘무한한 시간 속에 한 인간이 차지하는 인생이란 순간에 불과하며…육체에 속한 모든 것은 굽이치는 물결이고, 영혼에 해당하는 것은 꿈과 환상과 신기루에 지나지 않는다. 삶은 하나의 전투이며, 후세에 남는 명예란 망각일 뿐이다.’(유동범 역, 『명상록』, 인디북, 35쪽). 그래, 삶이 전투라지만 결국 무엇이 남는가. 그는 인간들이 인생에서 소중히 여기는 것들은 모두 공허하고 헛된 것들이며, 인간들은 서로를 물어뜯는 강아지나, 싸웠다가 금방 웃고 또 금방 울음을 터뜨리는 어린애와 다를 바 없다(106쪽)고 보았다.

내 눈은, 적군의 시체를 넘고 넘는 로마인 이야기를 밟고 올라, 그 꼭대기에 닿는다. 거기에 원래 아우렐리우스의 동상이 붙어 있었다고 하나, ‘명예란 망각일 뿐’이란 그의 예언대로, 지금은 바울이 그 맨 윗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하기사 제국의 심장 로마에서 사도 바울은 신앙의 꽃을 피웠으니 기독교 국가답게 권력은 그 밑으로 묻힐 수밖에.

로마에 와서 읽는 아우렐리우스의『명상록』은 나에게 특별하다. 그가 죽은 뒤, 화려했던 로마제국도 그의 언급처럼 결국 쇠퇴해갔다. ‘오만한 마음가짐을 떨쳐 버리고 모든 것을 겸허한 자세로 받아들여라. 그리고 언제라도 그것을 떠날 수 있는 마음의 준비를 갖추어라’(187쪽) 노자의 ‘功遂身退’다. 아우렐리우스는 생각했다. 인간을 지배하는 것은 이성이며, 우주적 이성에서 모든 사물의 변화와 소멸이 생겨난다고.

‘머지않아 당신은 재로 변하고 이 땅에 설 자리도 없게 되리라는 사실을 기억하라. 또한 눈앞에 있는 모든 것과 살아있는 모든 것들 역시 사라지고 말 것이다.’(285쪽) 이런 사물의 성향에 화내지 말지어다. 왜냐? 사물은 당신의 분노에 대해서 조금도 개의치 않기에. 타인의 비판에 휩쓸리지 말고 자신의 격한 감정에도 휘말리지 말라! 바로 냉엄한 ‘이성’의 힘이다. ‘당신을 조종하는 것은, 당신의 내면 깊은 곳에 숨어 있는 힘이라는 것을 기억하라. 그것은 설득하는 말의 근원이자, 생명이며 바로 인간 그 자체이다.’(249쪽) ‘많은 사람들이 시골이나 바닷가, 또는 깊은 산중에 은둔해 살기를 바란다. 그러나 이런 것은 철학을 하는 사람에게는 부질없는 짓이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원기둥의 부조 부분을 확대한 것이다. 사진=최재목

왜냐하면 그는 자신이 원하기만 하면 언제든 그 자신 속으로 은둔할 수 있기 때문이다.’(56쪽) 이처럼 로마에는 이성으로 철학하려는 단단함도 들어있다. 그러나 로마는『명상록』을 읽듯 어딘지 좀 우울하고 허망하다. 그래서 ‘항상 사물 전체를 보라.’(284쪽)고 했던가. 허망은 이성적 사색 속에서 이해되고, 용서되는 법. 석가가 사위국의 바라문 출신 수보리에게 말한 것처럼 말이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다 허망하다. 만일 갖가지 형상 있는 것이 형상 아닌 것인 줄 알면 바로 여래를 볼 것이다(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금강경』)

로마로 오는 도중 나는 밀라노에서 성 어거스틴(354~430)의 뜨거운 ‘눈물’을 떠올렸다. 그는 로마에서 밀라노로 와서 살 때, 집 정원의 무화과나무 밑에 꿇어앉았다. 어린아이가 어머니 품에 안기듯, 발가숭이의 영혼으로 하나님 앞에 섰다. 참회의 눈물이 소낙비처럼 쏟아져 내렸고, 그때 이웃집에서 홀연 들려왔던, 소년인지 소녀인지 모를, 노래 소리. ‘들고 읽어라, 들고 읽어라(tolle lege, tolle lege)’. 그는 이것을 ‘성서를 펴서 첫 눈에 들어온 곳을 읽어라!’는 하나님의 명령으로 받아들여, 로마서 13:13-14를 읽게 된다. 순간 ‘확실성의 빛’이 그의 마음속에 들어와 의심의 모든 어두운 그림자를 몰아낸다(『고백록』8, 12, 28~29 참조). 무화과(=십자가)나무 아래서 소낙비처럼 줄줄 쏟아지던 참회의 눈물이 희생제물로 바쳐지자 ‘소리=하나님의 외적 부름’이 ‘성서의 말씀’을 확인하게 했다. 그러자 ‘빛=성령’이 그 내면에서 役事한다. 이 장엄한『고백록』의 광경은 뜨거운 ‘신앙’의 영적 드라마 아닌가.

로마의 거리를 걸을 때 느끼는 ‘신앙과 이성’의 팽팽한 밀고 당김. 그 어딘지 모를 불안감을 추스르며, 나는 뚜벅뚜벅 트레비 분수 가로 걸어가, 5월 중순 로마의 저녁을 맞는다. 거기, 오드리 헵번처럼 아이스크림을 손에 들고, 서로 어깨를 기댄 청춘들, 간혹 분수를 뒤로 하고 어깨 너머로 동전을 던진다. 로마에 다시 올 수 있다는 소원 때문이라는데. 묵묵히 돈만 받아 챙기는 큰 물통은 입 같기도. 원래 로마시대의 하수구 뚜껑이었다는「진실의 입」처럼, 우리는 있지도 않은 뚫린 저 구멍 뒤 ‘그 무엇’(허상, 허망)에 홀려 돈과 정력을 탕진하는가.

분수의 물줄기는 끊임없이 허공으로 솟았다가 수면에 다시 떨어지고, 파문은 거듭거듭 물결에 짓밟힌다. 밑도 끝도 없이 쌓고 허무는 것들. 나는 그것이 바로 내 마음 맨바닥에 흐르는 고뇌임을 안다. 그토록 오랫동안, 나는 내 속에서 얼마나 썼다가 지우고, 지웠다가 다시 써보았던가. 천번만번 생겨났다, 사라지는, 그 가지가지 번뇌의 풍진인 글자들을.

최재목 영남대ㆍ철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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