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是非世說_ 청와대 대변인
是非世說_ 청와대 대변인
  • 김영철 편집위원
  • 승인 2013.05.21 14:2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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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첫 대통령 대변인은 김광섭 시인이다. 「성북동 비둘기」의 김광섭 시인은 1948년 7월 24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함께 이승만 대통령의 초대 공보비서관으로 임명돼 그 직을 맡았다. 그는 대변인으로 이런 말을 남긴다. “하고 싶은 말을 하지 못할 바에야 차라리 아무 말도 하지 않겠다.” 이런 소신이라면 ‘대통령의 입’ 역할을 해야 하는 처지에서 대변인 직 수행에 적잖은 애로가 있었을 것이다.

청와대 대변인이란 명칭은 1960년 4·19 혁명 이후부터다. 그해 8월 취임한 윤보선 대통령은 대통령 관저 명칭을 청와대로 바꾸는 한편 공보비서관과는 별도로 대변인 직제를 신설하는데, 그 첫 청와대 대변인으로 신문기자 출신의 김준 씨를 임명한다. 그는 5·16 군사쿠데타로 윤 대통령이 사임하게 되자 우리 헌정사상 대통령 하야성명을 처음 발표한 대변인이기도 하다.

청와대 대변인은 이때까지만 해도 그 존재가치가 그렇게 썩 부각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박정희 대통령 시대가 되면서 그 자리도 권부의 하나로 여겨지는 전환점을 맞게 된다. 박정희 시대는, 그의 집권이 군사무력에 의한 것이라는 점에서 法治보다는 人治의 시대였다. 이런 권력구조의 시대는 측근 정치시대이기도 하다. 모든 정부권력의 요직이 측근에 의해 장악되는 상황에서 ‘대통령의 입’이라는 대변인의 자리도 주요 권부의 하나가 된 것이다.

이 시대 청와대 대변인들은 모두가 그야말로 박정희의 ‘충실한 입’이었다. 대통령의 말과 생각을 어떻게 잘 다듬고 잘 전해 국민들이 잘 따라오도록 하느냐에, 김성진 전 대변인의 말대로 “목숨을 걸었다.” 여기에 대통령의 마음상태를 잘 알고 담아내는 ‘심기대변’이라는 용어까지 등장한다. 차지철 전 경호실장의 ‘심기경호’도 같은 맥락이다. 박정희 시대의 이런 대변인은 대부분이 장수한다. 김성진 대변인이 4년5개월을, 그리고 임방현 대변인도 4년을 넘겼다. 이들이 박정희 시대의 이른바 ‘명 대변인’으로 꼽혀진다. 박정희가 시해당한 그 다음날 아침, 정부청사 칠판에 대통령 유고사실을 울먹이며 적어 알리던 김성진은 당시 문화공보부 장관으로 정부 대변인이었다.

박정희시대 이래 청와대 대변인은 대통령 측근이기도 하지만 대부분 언론계 출신으로 그 분야에선 상당한 평가를 받는, 능력 있는 사람들이 그 자리를 꿰찼고 이제까지도 대개는 그렇다. 물론 기상천외한 상식 밖의 아부 등을 통해 그 자리에 오른 몇몇 사람도 있다. 충성심에다 대통령의 철학과 생각을 이론적으로 펼칠 수 있는 논리와 업무의 전문성, 그리고 그 자리에 합당한 합리성과 매너는 기본적인 덕목이었다. 청와대 대변인 자리는 그게 기준이고 하나의 전통이었다.

박근혜 대통령의 방미 중 성 추문 의혹에 휩싸인 윤창중 전 청와대 대변인은 역대 이런 대변인들에 비해 특이하고 별난 존재다. 그는 한때 공무원 생활도 했지만 출신은 언론계다. 대통령과의 관계는 보는 관점마다 다를 수 있겠지만, 그의 말로 미뤄보면 가까운 관계인 것 같다. 이를테면 박 대통령이 대통령이 되기 전 1시간 이상의 독대를 갖는 등의 친분관계도 있었고, 대통령이 그의 칼럼에 관심이 많아 직접 챙겼다는 전언까지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대변인이 될 걸로 예상한 사람은 많지 않다. 그의 극우적이고 돌출적인 성향과 성격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의 주변엔 ‘적’들이 많았다는 얘기다. 그러나 대통령으로서는 여러 관점에서 생각이 달랐을 수가 있다. 그가 대변인이 되고 세찬 반대가 있었을 때, 박대통령이 “잘 참고 견뎌라”는 전화까지 했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그런 그가 이번에 대통령과 나라를 부끄럽게 만드는 전대미문의 사고를 쳤다. 사고가 나니 그에 대한 부정적인 리뷰가 새삼 지면을 뒤덮고 있다. 결국은 그에 대한 반대의 논리가 옳았다는 얘기다. 박 대통령이 난처해졌다. 반대가 대세였고 옳았음에도 불구하고 왜 그를 기용했는지에 대한 부담을 고스란히 질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됐고, 그에 대한 착잡한 심정의 일단을 밝히고 있다. 사고 후 지리멸렬한 청와대의 처리 과정도 상당한 부담이다. 그러나 사후약방문일지언정 그런 판단이 들 때 빨리 조치를 취하는 게 그나마 후과를 줄일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다. 주변의 이른바 측근인사를 다시 한번 점검하는 것도 물론 이에 포함된다.

김영철 편집위원 darby4284@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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