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3-29 16:45 (금)
지성의 죽음을 보는 세 가지 시각
지성의 죽음을 보는 세 가지 시각
  • 최익현 기자
  • 승인 2013.05.20 15:5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사라지는 지식인’ 조명한 <녹색평론> 130호(2013.5~6월)

 

“지금 인류사회는 역사상 전례가 없는 복합적인 위기에 직면했다. 그러나 깊게 생각해보면,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이 위기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지혜와 용기, 그리고 무엇보다 정치적 역량이 이 세계에 과연 존재하느냐 하는 것일 것이다.” <녹색평론> 발행인 겸 편집인 김종철의 말이다. 이러한 문제의식을 담아 마련한 <녹색평론> 130호에서 의외다 싶은 기획 하나가 눈길을 끈다.

바로 ‘대학의 타락, 지성의 죽음’이다. 헨리 지루 캐나다 맥마스터대 영문학 및 문화연구 교수의 글 「사라지는 지식인-공적 가치의 쇠퇴와 대학의 위기」, 독립 언론인 크리스 헤지스의 글 「지혜의 환상-돈에 물든 교육과 비판적 지성의 죽음」, 원자핵물리학자인 토요시마 코이치 사가(佐賀)대 대학원 공학계 연구과 교수의 글 「어용학자 비판이 불가능한 대학사회」 등이 하나의 기획으로 묶였다. 과연 이들은 어떻게 지성의 죽음을 진단하고 있는 걸까. 이들의 글은 변화와 위기의 기로에 서 있는 한국 대학과 교수사회, 지성들에게도 시사적이어서 그 일단을 옮겨본다.

헨리 지루: 민주적 공공영역으로서의 고등교육이라는 개념은 지난 30년간 빈사상태였다. 이 상황에서 교수들이 학생들을 비판적으로 사유하도록 가르칠 책임을 이행하고자 할 때는, 그들은 흔히 직업적 성실의무를 저버리고 교실을 정치투쟁의 장으로 만든다는 비판을 받거나 혹은 심지어 비애국자라는 낙인까지 찍힌다. 심한 경우에는 일자리를 잃어버릴 위험에 처하기도 한다.

특히 그들이 권력의 작동방식이나 사회적 不正義, 인간적 비참을 명확히 드러내고, 사회질서란 변경 가능한 것이라는 사실을 밝힐 때 그러하다. 교양교육이나 인문학이 자유의 실천을 학생들에게 가르치지 않는다면, 그것들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스스로에 대해서 묻기를 꺼리거나 물음을 던질 능력이 없는 사회, 시민보다 소비자를 더 중시하는 사회, 그리하여 기업의 이해관계라는 좁은 가치에 전적으로 매달린 사회일수록 비판적 사유와 대화의 공간으로서의 대학의 중요성은 그만큼 더 절실해진다.

크리스 헤지스: 인문학뿐 아니라 교수 자신들도 위험에 처했다. 대부분의 대학들은 이제 가장 훌륭하고 경험이 많은 교사가 아니라 가장 싼 교사를 고용한다. 종신재직권을 획득했거나 그 과정 중인 교사들은 교육노동인구의 35%에 불과하고, 그 수치는 꾸준히 떨어지는 중이다. 교수들은 갈수록 날품팔이처럼 돼, 종종 두세 개 학교를 돌아다녀야 하고, 연구 공간을 받지 못하고, 최저생활임금을 벌지 못한다. 삶을 돈과 권력의 축적으로 보는 근시안적이고 편협한 시각은 20세기 초에 카네기나 크레인 같은 탐욕스러운 자본가들에 의해 조장됐지만, 이제 교육의 지배이념이 됐다. 인문학으로부터의 도피는 양심으로부터의 도피가 됐다. 그것은 자신의 임무와 분야 너머를 보면서 자신의 일을 점더 넓은 사회 맥락 속에 놓고 보는 것을 좀처럼 하지 못하는 전문가 지배계급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인문학이 제기하는 도덕·사회 문제를 외면함으로써 그들은 우리의 문화를 파괴해온 기업식 구조에 봉사하는 쪽을 선택한다.

토요시마 코이치: ‘과학독재체제’에 제동을 걸고 이 사회가 조금이라도 민주주의에 가까워지기 위해서는 당사자인 과학자공동체, 특히 대학사회의 종합적인 비판정신과 비판력을 키우지 않으면 안 된다. 적어도 대학론과 지식인론을 전개할 필요가 있다. ‘대학의 마땅한 모습’에 대한 설득력 있는 이론을 갖지 않고서는 문부과학성과 직접 대면하는 대학 수뇌부들은 이 나라의 전통적인 관료우위 문화 속에서 도쿄 관료로부터의 압력이나 세뇌 앞에서 잠시도 지탱하지 못하고 쓰러지고 말 것이다.

일반 대학교원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도쿄의 밀실에서 무엇이 어떻게 결정되는지 상세한 내용을 알 방도도 없이 그저 학장이나 학부장이 마치 神官처럼 고지하는 ‘사회의 요청’이나 ‘어려운 정세’에 복종하는 수밖에 없다. 또는 중앙교육심의회 등, ‘어용학자’들이 만들어내는 방침을 ‘예상’하는 게 고작일 것이다. 이 나라에서는 본격적인 대학론은 이 반세기 동안 거의 갱신된 바가 없었던 게 아닐까.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