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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베리아 횡단해 소련연방으로 여행… 역사의 교훈 생각
시베리아 횡단해 소련연방으로 여행… 역사의 교훈 생각
  • 김일평 코네티컷대 명예교수
  • 승인 2013.05.20 13:2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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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평 교수 회고록(47) 새로운 고향, 코네티컷주립대 시절 2

우리 가족이 처음 코네티컷 주에 왔을 때 우리는 먼저 교수 아파트에 짐을 풀고, 근처 집값도 알아보고, 또 어디에 위치한 집이 애련이와 금련이가 초등학교에 다니는데 편리한지 알아보기 위해 집을 사는 것을 기다리고 있었다. 집 사는 것을 미룬 데는 이유가 있었다. 블루밍턴에서 처음 집을 샀을 때 아이들이 학교에 통학하는 여건에 대한 생각을 전혀 하지 못하고 집을 덜컥 샀기 때문에 매우 불편했던 기억이 있었기 때문이다. 또 우리가 인디애나를 떠날 때 우리의 집을 팔 수 없었기 때문에 1년 동안 세를 놓아야 했던 것도 한 이유다. 집 문제로 골치 아픈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기 때문에 코네티컷의 집은 좀 더 신중을 기해서 20~30년 동안 살 수 있는 집을 구입하기로 했던 것이다.

우리는 교수 아파트에 입주해 있다가 3년 후에야 비로소 우리집을 새로 장만했다. 새로 구입한 집은 전통적인 콜로니얼 하우스(Colonial House)로 2층 집이었다. 아내 정현용은 집을 뜯어 고치고 또 응접실과 식당을 바꾸고, 식사를 준비하면서 밖을 잘 내다볼 수 있고 또 응접실과 뒤뜰의 아름다운 화단의 꽃을 감상 할 수 있는 경치 좋은 집으로 탈바꿈을 했다. 미국의 잡지를 보고 또 연구를 많이 해서 집 밖에서 보면 전통적인 콜로니얼 하우스 형태인데, 집에 들어와서 보면 현대식으로 꾸며놓았으며, 뒤뜰 정원을 감상할 수 있게끔 수리와 보수를 많이 했다. 누가 와서 보더라도 참으로 아름답고, 경치 좋은 집으로 변화시켜 놓은 것은 정현용 박사가 미술감상에 있어서 특유한 자질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우리의 두 아이들이 다닌 고등학교는 1970년대에 코네티컷주립대의 부속 고등학교(E.O. Smith High School)인 공립고등학교로 명성이 자자한 곳이었다. 이곳으로 옮겨가기 전 큰 딸 애련이와 둘째 딸 금련이는 일본에 있는 미국학교(American School in Japan)에 1년간 통학했다. 아이들의 교육을 위해 교수 사택이 필요했던 나는 국제기독교대학 (International Christian University-ICU)에서 국제정치학을 한 강좌 강의하기로 했다. 이렇게 강좌를 맡아주면 교수 사택을 배려하겠다는 제안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나는 미국 코네티컷대 학부 강좌인 ‘국제정치학개론(Introducation to International Relations)’을 강의하기로 했다. ICU 캠퍼스는 도쿄의 중심에서 전철로 한 시간 정도 거리인 교외의 미다카에 위치해 있었다. 국제기독교대학은 가로수가 즐비하고 미국의 주립대학 캠퍼스를 연상시키는 경치가 매우 좋은 캠퍼스였다. 나는 1년간 이곳에서 초빙교수로 ‘국제정치학개론’을 강의하기로 결정하고, 아이들은 자전거로 10분 거리에 있는 미국학교에 보냈던 것이다.

도쿄의 미국학교는 미국 동부에 있는 ‘프리패러터리 스쿨’(Preparatory School)같이 미국의 일류대학에 진학할 수 있는 실력을 길러주는 고등학교이다. 일본 대사관에 나와 있는 외교관의 자녀들, 도쿄에 비즈니스를 하기 위해 파견돼 있는 각종 상사직원의 자녀들, 그리고 우리와 같이 교환교수로 일본에 나와 있는 교수와 학자들의 자녀, 그리고 미국인 비즈니스스맨의 자녀들 등 많은 미국사람과 외국인들의 자녀들이 초등학교 1학년에서 고등학교 3학년까지 공부하는 학교다. 사립고교이기 때문에 미국의 사립고교와 맞먹는 비싼 등록금을 내야 한다. 풀브라이트로 온 학자(Fulbright Scholar)들의 경우, 자녀들의 등록금은 일미교육위원회 (Fulbright Commission in Japan)에서 지불해 주기 때문에 우리 아이들의 교육비는 우리가 직접 지불하지 않았다. 아이들은 즐거운 1년을 일본에서 보냈다.

애련이는 미국에서 고등학교 다닐 때부터 창작에 취미가 있었고 또 재능도 있었기 때문에 일본에서 미야케라는 섬에 수학여행을 갔을 때 자기가 보고 또 경험한 것을 수필로 써서 당선되기도 했다. 애련이는 이 글로 미국에서 저명한 ‘Scholastic Award-Writing’상을 받았다고 바로 앞 회에서 서술했다. 그 이야기를 조금 더 부연해보자.

애련이와 사위 캠펠의 결혼 사진.

당시 ‘창작 분야’의 특별상을 준 편집자의 코멘트는 이렇다. “This essay is about breakthrough the cultural and language barriers that separate people. In a more immediate sense it clearly recalls one of the unusual moments in life when a person gains a clear insight into herself and into the world around her.” (이 수필은 사람들을 떼어놓게 하는 문화와 언어의 장벽을 관통하고 있다. 좀 더 직선적으로 말하면 이 수필은 인간이 자신과 자기 주변의 세계에 대한 투명한 통찰력을 얻게 되는 삶의 비범한 순간들의 하나를 분명하게 환기하고 있다). 즉 애련이이의 관찰력과 통찰력에 대한 과찬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재능을 갖고 있는 애련이는 웰슬리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하고 버클리에 있는 캘리포니아주립대(University of California at Berkley)의 대학원 영문과에 진학했다. 그리고 거기서 그녀는 자신의 창작력을 인정받아 대학 홍보실에서 파트타임으로 일 할 수 있었다. 파트타임으로 일하던 그녀가 버클리의 가주대학 부총장 겸 개발처장(Director of Development)으로 승진한 것은 카네기재단에서 1억 달러($100 million)의 지원금을 받을 수 있는 신청서를 그녀가 작성했기 때문이었다.

카네기재단은 주로 사립대학에 창작 지원금을 주는데, 애련이의 신청서(Grant Proposal)가 어찌나 설득력이 있었으면 1억 달러를 주기로 결정했을까 라는 의문을 제기하는 학자도 있었다. 애련이는 그동안 사귀던 미국친구 리처드 갬펠(Richard Gampel)과 결혼도 하고 또 장남을 낳았다. 장남 타이러스(Tyrus)는 매우 잘 자라고 있으며 벌써 초등학교 2학년에 재학 중이다.

도쿄대 교환교수 생활 마칠 무렵

나는 1976~77년에 일본 도쿄대에 풀브라이트 교환 교수로 1년간 가르친 경험이 있다. 우리 부부가 1977년 미국으로 다시 돌아 올 때, 우리는 초등학교에 다니는 두 딸을 데리고 러시아(구 소련)의 시베리아를 횡단하는 모험여행을 했다. 우리 가족은 일본 요꼬하마에서 일본상선을 타고 블라디보스톡(Vladivostok) 항에 도착해 시베리아를 횡단하는 기차를 타고 하바로프스크까지 가서 다시 항공기로 갈아타고 모스크바에 도착했다. 이 여행 코스는 여행사가 우리에게 만들어 준 여행일정이었다.

40년 전인 그 당시 일본에서 배를 타고 동해를 횡단해 블라디보스톡까지 가서 다시 소련철도를 이용해 모스크바까지 여행한다는 것은 매우 모험적인 여행이었다. 특히 국민학교(초등학교)에 다니는 애련이와 금련이가 잘 참아 준 것이 매우 기특했다. 우리는 일본에서 예약한 그대로 모스크바에서 관광일정을 예약하고, 또 모스크바에서 ‘서백림’(West Berlin)까지 기차를 이용했다(이와 같은 소련기행은 한국의 경향신문·문화방송 부설 政經硏究所 에서 발행하는 <政經硏究> 1978년 6월호부터 「재미 한국인정치학자 金一平 蘇聯紀行」이라는 제목으로 3회에 걸쳐 연재됐다).

김일평 교수의 소련방문 기행기를 실은 <정경연구>와, 단행본 『모스크바에서 北京까지』.

나는 가족과 함께 기차를 타고 유럽을 횡단하는 것은 매우 낭만적이고, 또 구경도 많이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일본에서 상선을 타고 구소련의 블라디보스톡 부근에 있는 나호드카 (Nahodka) 항구에서 내린 것은 보안상의 이유였다. 블라디보스톡 항은 구 소련의 군사기지로 사용됐기 때문에 혹시 일본사람들 중에는 스파이가 끼어 다닐지도 모른다는 소련의 의심이 작용해 외국인의 출입이 금지되고 있었다. 1990년 9월 30일 러시아와 한국의 수교가 발표된 후 두 나라 간에 교역량이 매우 증가했고, 또 인적 교류도 매년 증가하기 시작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우리 가족은 나호드카 항구에서 기차를 갈아타고 시베리아 광야를 횡단해 하바로프스크까지 가야 했다. 기차를 타고 시베리아 산림을 속을 횡단해 하바로프스크까지는 거의 일주일이 걸린다. 러시아의 깊게 우거진 산림을 관찰하면서 이들이 엄청난 지하자원이 매장돼 있는 것을 아직도 발굴하지 못한 것은 무엇 때문인지 생각하기도 했다. 공산주의라는 이데올오기 때문인지 아니면 구 소련사회의 노동력이 부족하기 때문인지 해답을 내리지 못하고 있을 무렵, 우리는 마침내 중부러시아의 수도 하바로브스크에 도착했다.

중앙아시아의 하바로프스크는 일본제국주의 시대에 조선공산주의자들의 활동무대였다. 1918년 소련공산당의 지도자 레닌은 국제공산당운동(Communist International- Comintern)을 조직해 세계 공산주의 운동을 전개했을 때 중앙아시아의 하바로프스크와 이루스크에 망명해 살던 고려인들(즉 조선사람들)이 이 운동에 많이 참여했다. 따라서 중앙아시아의 하바로프스크는 아시아 공산주의 운동의 메카와 같은 역할을 했다. 우리 일행은 소련의 관광 안내원의 인도를 받아 하바로프스크 중심가에 있는 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하바로브프크 공항에 가서 모스크바행 소련국내 항공 에어로프를 탔다. 일본여행사에서 미리 예약해 놓은 호텔에 투숙했다.

조선공산주의자들의 활동 무대 하바로프스크

이튿날부터 일주일동안 모스크바 시내관광에 나섰다. 아이들과 함께 우리 부부가 이렇게 모스크바에 와서 관광할 기회는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니 이번 기회에 모스크바의 역사적인 유적지와 박물관을 다 보고 가자고 말했다. 모스크바의 시내 관광은 도쿄에서 예약해 놓은 것과 같이 일주일 동안 호텔에서 묵으면서 할 수 있었다. 우리들은 주로 모스크바 시내 관광을 많이 했다.

1977년의 시내는 교통이 그다지 붐비지도 않았고, 또 개인 차량도 거의 없었다. 승용차는 정부기관에 속하는 군용차이고 개인이 소유하는 차는 거의 없었다. 동양계 사람들이 많이 눈에 띄기는 하지만, 백계러시아 사람들이 팔 할 이상을 차지하고 있었다. 모스크바의 도로는 6차선으로 확 틔어 있고 도쿄의 교통량보다는 훨씬 적은 편이었다. 모스크바 시내의 6차선 도로의 중앙에는 잔디를 입힌 화단을 만들어서 장식했다. 도로변과 인도 사이에는 가로수가 즐비해 있었고 버스 정류장에는 사람들이 질서정연하게 서서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큰딸 애련이는 소련사람은 조직 속에서 태어나고, 조직 속에서 살다가 죽는 것 같다고 말을 해 우리 가족은 한바탕 웃기도 했다.

모스크바는 사방 880km의 도시, 인구는 1977년 현재 8백만이라 했다. 30여 년이 지난 오늘날에는 1천 만이 넘는 세계적인 도시로 성장했다. 모스크바는 유럽 제일의 도시일 뿐만 아니라 도쿄나 뉴욕과 맞먹는 대도시로 자처하고 있는 곳이다. 뉴욕 콜럼비아대 대학원에서 공산권 연구를 하고 있을 때 소련에 대해 들었던 강의의 내용들이 이모저모 주마등처럼 낸 눈앞에 다가온 것이다.

<적기>, <노동신문> 팔고 있던 러시아 호텔

1977년은 러시아 볼셰비키 혁명 60주년이 되는 해였다. 20여 층의 아파트 단지를 모스크바 시내에서 볼 수 있었다. 마치 도시계획 때 새로 지은 뉴욕의 아파트 단지처럼 느껴져서 착각이 들 정도였다. 우리일행은 모스크바 江 건너 모스크바시의 붉은 광장에 있는 러시아 호텔에 투숙했다. 새로 건축한 호텔이기 때문에 매우 깨끗하고 투숙객도 상당히 많았다. 러우리가 묵었던 호텔은 1970년대 초반에 새로 지은 건물로 6천명 이상의 여객을 수용할 수 있는 웅장한 호텔이었다. 24층까지 엘리베이터로 올라갈 수 있다. 호텔 방의 창을 통해 내려다보면 모스크바 강가의 붉은 광장이 한눈에 들어오는 아주 전망이 좋은 곳에 위치한 호텔이었다. 지방에서 수도로 공무 때문에 올라 온 사람도, 또 관광객이나 그 밖의 용무로 지방에서 모스크바까지 온 사람도 투숙할 수 있는 곳이다. 호텔 로비에 있는 매점에서는 일본의 <赤旗>, 중공의 <人民日報>, 북한의 <勞動新聞>까지 팔고 있었다. 간단한 엽서는 그 자리에서 부칠 수 있었다.

우리 일행이 저녁식사를 함께 하기로 정해진 곳은 호텔 남쪽 건물에 있는 큰 식당이었다. 일본에서 함께 온 일행도 같은 테이블에 함께 앉아 마치 성대한 만찬을 베풀어 받는 기분이었다. 우리 가족의 모스크바 관광과 다음해(1978년)의 중국기행문은 『모스크바에서 북경까지』라는 기행문집에 수집돼 있으니 관심이 있는 독자는 참조하시기 바란다.

우리는 모스크바에서 일주일간의 관광을 끝마치고 기차편으로 동독을 거쳐 서백림으로 가기로 예정돼 있었다. 그러나 동백림에서 서백림으로 건너가는 길에는 철저한 심사가 있었기 때문에 좀 지루한 생각도 들었다. 그리고 서독의 미군군사기지에 복무하고 있는 옛 친구 코프만 대령 부부를 다시 상봉하고 2박 3일을 코프만 대령 집에서 보낸 후 미국에 돌아왔다.

위의 왼편부터 크레믈물린 궁전, 오른편 사진은 우리 네 식구 정현용, 금련이, 애련이, 그리고 필자 등이 일본 요꼬하마에서 소련 여객선을 타고 러시아의 나호드카 항에 내려서 찍은 사진. 아래쪽 왼편의 러시아인 안내원이 관광설명을 하고 있다. 아래쪽 오른편 사진은 러시아 정통교 교회당 앞에서 필자가 찍은 정현용, 애련이, 금련이 모습.

그러나 일본에서 풀브라이트 연구교수로 있을 때, 도쿄대에 연구교수 또는 객원교수로 있으면서 일본의 6개 도시와 동남아시아와 인도네시아, 그리고 싱가폴 등지에 특별강의와 방문강사로 초청받을 수 있었든 것은 일본 주재 미국 대사관의 문정관 해리 켄달(Harry Kendall)의 후의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할 일이었다. 나는 아직도 해리 켄달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금할 수 없다(‘도쿄대 방문을 회고한다’를 참조하기 바람).

나는 과거에 일어난 역사사실을 기록해서 후세들이 역사를 배우고, 또 그 역사의 사실과 배경을 이해함으로써 역사의 교훈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는데 나의 회고록을 쓰는 목적이 있다고 이 회고록의 서두에서 밝힌 바 있다. 기록해야할 역사적 사실에는 물론 긍정적인 사실도 있을 것이고 또 매우 부정적인 사실도 있을 것이다. 긍정적인 사실이나 부정적인 사실을 막론하고 역사적인 사실은 우리 후세들에게는 모두 교훈으로 남겨 두는 것이 곳 역사다. 역사의 교훈을 잊어버린 민족은 그 역사를 다시 되풀이한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부록 ‘미국역사 강의 노트’를 참조하기 바람).<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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