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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년 삶의 무대가 되는 코네티컷대로 … 학자로서의 새출발
40년 삶의 무대가 되는 코네티컷대로 … 학자로서의 새출발
  • 김일평 코네티컷대 명예교수
  • 승인 2013.05.11 15:1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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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평 교수 회고록(46) 새로운 고향, 코네티컷주립대 시절 1

내가 인디애나대에서 5년간 가르친 후 코네티컷주립대(University of Connecticut. 줄여서 흔히 유콘(UConn)이라고 부른다)으로 옮겨 온지도 벌서 40년이 넘었다. 우리는 UConn 에서 1970년 가을학기부터 가르치기 시작했다. 나의 처 정현용은 인디애나대 도서관 대학원 (Graduate School of Library Science)에서 석사학위(M.A.)를 받았지만 바로 도서관에 직장을 구할 수가 없었다. 때마침 코네티컷주립대(UConn)에서 국제정치와 중국정치를 가르치든 첸련 교수가 대만대로 떠났기 때문에 자리가 하나 생겼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우연의 일치였는지는 몰라도 하와이 동서문화센터에서 석사학위를 하고 일리노이대(University of Illinois)에서 중국역사를 전공한 후 박사학위를 받은 허만 매스트(Herman Mast) 역사학과 교수가 나에게 정보를 제공하면서 정치학과의 루이스 거슨(Lois Gerson) 교수에게 나의 이력서와 중국담당 교수직에 지원하겠다는 편지를 보내라고 전화로 친절하게 알려 주었다.

그 당시에는 아직 전자우편(E-Mail)이 발달하지 않았을 때였다. 허만 매스트 교수는 내가 1964년 겨울 우리의 장녀 애련(Irene)을 한국의 장모님에게 맡기고 대만과 홍콩에서 나의 박사학위 논문 자료를 구할 때 대만에서 만난 미국친구다. 그는 나보다 거의 10여년 어린 나이지만 대만 출신 중국여성(Linda)과 대만에서 결혼하고 돌아와서 코네티컷주립대 (UConn)에서 중국역사를 강의하고 있었는데 공부보다는 돈 버는 데 재능이 있어 보였다. 그는 자기가 적극적으로 밀고 로비해서 내가 코네티컷 주로 오게끔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말했다. 나는 학위논문도 끝마쳤으며, 인디애나대 교수직 경험도 합하면 이제는 부교수로 승진하고 또 박사학위 논문을 책으로 출판하는데 필요한 기금을 코네티컷 대학재단 (University Connecticut Foundation)에 신청하면 얻을 수 있을 것이니 옮겨오라고 권했다. 특히 나의 처 현용의 대학도서관의 취업문제도 해결될 수 있다고 하니 우리는 옮기기로 결정했다.

허만 매스트 교수가 귀띔해준 코네티컷대 정보

정현용은 인디애나 대학원에서 도서관학으로 석사학위를 받았으나, 마땅한 직장이 없었기 때문에 아이들을 데리고 한국에 가서 부모님 댁에서 일 년 간 쉬고 있을 때였다. 아내는 애련이와 금련이를 데리고 다시 돌아올 때까지 논문을 끝마치라고 말하고 서울에 나가 있었다. 인디애나에서 5년간 살아봐서 알지만 블루밍턴은 매우 작은 학교 촌으로 중국식당도 없었고, 또 중서부 미국인들은 매우 보수적인 동네였다. 외국 사람들은 기껏해야 중국 사람들 몇 명 있었고, 다른 외국인은 아직 많이 살고 있지 않았기 때문인지 외국인이 살기에는 어려운 농촌 지대였다.

코네티컷주립대에 대해 매력을 느낀 것은 뉴욕과 보스턴의 중간 지점에 있기 때문에 주말에는 뉴욕에도 갈 수 있고, 또 보스턴은 한 시간 거리밖에 되지 않기 때문에 뉴욕과 보스턴은 하루에 왕래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우리는 대학원 시절 뉴욕에서 살았기 때문에 뉴요커로 자처하면서 향수를 느끼는 곳이다. 따라서 나는 서울에 전화를 걸고 나의 처 정현용과 상의한 후 아이들을 데리고 돌아오기를 권고했다. 코네티컷주립대에서는 도서관에 직장도 생기니 그렇게 하기로 결정했다. 그리하여 정현용은 두 딸을 데리고 블루밍턴으로 돌아와서 봄 학기가 끝날 때까지 짐을 싸고, 이사준비를 시작했다. 그리고 우리는 1970년 6월에 아이들 (애련이와 금련이)를 새로 산 차에 태우고, 내가 직접 드라이브해서 블루밍턴을 떠나서 코네티컷주립대로 옮겼다. 새로운 삶의 시간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허만 매스트 역사학과 교수는 나에게 뉴잉글랜드 사람들은 매우 진보적이기는 하지만 중부의 미국사람들보다 말이 적고, 좀 내성적인 사람들이라고 나에게 알려 주었다. 중서부 사람들은 굉장히 말을 많이 하고, 허세를 부릴 때가 많으나 뉴잉글랜드 사람들은 말 그대로 양키들이기 때문에 함부로 말하지 않고, 확실할 때만 말을 하는 성격이 있는 사람들이다. 그들이 한번 말하면 믿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중서부 사람들보다 친해지기가 매우 힘들고 시간이 많이 지나면 친해진다는 것이다. 영어로 좀 리저브(Reserve)된 사람들이 코네티컷트 양키들이라고 했다. 그러나 한번 친해지면 오랜 친구가 된다는 것이다.

나는 우리 가족과 함께 40여 년을 코네티컷 주에 살고 있다. 물론 안식년에는 일본 동경 과 한국 서울에서 일 년씩 보내기도 했지만. 40년 동안 살았기 때문에 코네티컷 주는 우리의 고향이나 다름이 없다. 코네티컷주립대에 와서 사회적인 활동이 많아지고 또 학계의 활동은 더욱 확대됐다. 우선 코네티컷주립대에 올 때 부교수로 승진하고, 인디애나대의 급료보다 두 배가 넘는 봉급을 받으니 생활수준도 많이 올라갔다. 나의 처 정현용은 코네티컷 대학의 도서관에서 직장을 얻어서 일을 시작했다. 그러나 멀지 않은 커뮤니티 칼리지 (Community College)의 도서관으로 옮기고 코네티컷주립대 사범대학에서 박사학위 (Ph. D.) 공부를 시작했다. 그리고 박사학위를 받은 후 커뮤니티 칼리지의 도서관장(Director of Library)으로 임명됐다.

더 왕성하진 학계 활동 그리고 아이들의 성장

우리 부부가 버는 봉급으로는 중류이상의 생활을 누릴 수 있게 됐고, 또 딸 둘을 동부의 좋은 대학에 보낼 수 있었다. 큰 딸 애련이는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이 졸업한 웰스리대학 (Wellsley)을 마치고 버클리의 캘리포니아대 (University of California at Berkeley) 대학원에 가서 영문학 교수가 되려고 공부하다가 글 쓰는 재주가 뛰어 났기 때문에 버클리 대학의 홍보실에 스카우트 당해서 일하다가 홍보담당 부총장보(Assistant Vice Chancellor) 겸 개발부장(Director of Development)으로 근무하고 있다. 카네기재단으로부터 1억 달러 ($100 million)의 기금을 신청한 서류가 통과돼 매우 바쁘게 일하고 있다.

애련이는 고등학교에 다닐 때 수학이나 과학 분야보다는 인문과학에 대한 관심이 많았고 또 과제물을 작성 하면 항상 A학점을 받았다. 때문에 웰스리대학에 진학해 영문학을 전공하고 작가가 되겠다는 꿈을 갖고 있었다. 고등학교에 다닐 때부터 영어소설을 한 주에 한권씩 읽었다. 우리가 1976~77년에 풀브라이트 연구기금(Fulbright Research Fellowship)을 받아서 일본의 도쿄대에 가 있을 때 딸아이들은 일본의 아메리칸 스쿨 (American School in Japan)에 다녔다. 그 때 일본의 미야케라는 섬에 수학여행을 갔던 경험을 큰딸 애련이가 마침 수필로 발표했는데, 애련이는 이 글로 미국의 ‘Scholastic Awards-Writing’ 작품상을 1982년 5월 14일에 수상했다. 아래 사진은 바로 그 때의 관련 사진이다.

 

둘째 딸 금련(Katherine-Kate)는 언니 애련이보다 4년 차이가 있지만 고등학교 때 E. O. High School 을 졸업하고 매우 좋은 성적으로 보스턴대(Boston University)에 입학해 사회과학을 전공하고 졸업했다. 어렸을 때에는 치과대학 혹은 의과대학에 간다는 생각이 있었지만 대학 3학년 때 과학 분야보다는 사회과학에 취미가 더 있기 때문에 사회과학 분야를 전공하고 졸업했던 것이다. 언니가 가주대학 (University of California at Berkeley)에 직장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버클리로 가서 언니의 조언을 받아 도서관학으로 석사학위를 끝 마쳤다. 둘째는 어머니의 직업이었던 도서관장 자리를 목표로 공부했다. 그리고 여기 저기 사서로 일했는데 아무리해도 정부기관의 사서가 좋을 듯해 워싱턴의 국립문서보관소(National Archives)에 취직해 그곳에서 일하고 있다. 정부기관의 월급도 이제는 상당히 올랐고 또 정부문서보관소의 사서는 공무원이기 때문에 다른 공무원과 똑 같이 전문직 대우를 제대로 받고 있다.

금련이는 고등학교에 다닐 때부터 정부 공무원이 좋다고 생각하면서 대학을 졸업하고 정부기관의 공무원이 되겠다는 꿈을 키웠기 때문에 미국정부의 문서보관소에서 일하면서 자기의 취미를 가꾸고 또 워싱턴의 문화 시설과 문화행사에 많이 참여하게 됐다고 매우 기뻐했다. 따라서 자기의 직장을 매우 즐기고 있는 것이다. 금련이는 자기는 항상 돈을 많이 벌어서 풍족하게 살 수 있는 직업에 종사할 것이라고 말했다. 아버지는 대학교수로 있었고, 어머니는 대학원에서 박사학위 (Ph. D.)를 받고 대학 도서관 관장으로 종사 했는데도 항상 긴축생활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기가 보기에는 학자의 생활은 안정되고 중류생활을 유지하면서 자녀들을 대학까지 교육은 시킬 수 있겠지만 풍족한 생활을 하지는 못한다는 것을 일찍 깨달았던 것이다. 따라서 자기는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직업을 선택하겠다고 말했으나, 역시 학계에서 일하고 있으니, 이것도 우리 집안의 내력인 듯하다.

정부 공문서보관소라는 직장은 공무원의 직업이고 은퇴 후에도 퇴직금과 건강보험이 보장돼 있는 전문직이기 때문에 직장에서 은퇴한 후 연금으로 중류생활을 할 수 있고, 또 관광 여행도 일 년에 한, 두 번씩 갈 수 있다. 중류사회의 생활이 보장되는 셈이다(다음의 사진은 금련이가 국민학교 일학년 때 찍었고, 오른편의 사진은 보스턴대를 졸업할 때 찍었다. 애련이가 뒤에서 지켜보고 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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