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3-29 21:50 (금)
어느 산책자의 책읽기
어느 산책자의 책읽기
  • 교수신문
  • 승인 2013.04.08 16:5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Cogitamus 우리는 생각한다

 사유하는 산책자 정수복 박사가 ‘책 읽는 사람의 시간과 공간’이란 부제를 단 『책인시공冊人時空』(문학동네, 2013.3)을 펴냈다. 스스로를 ‘걷는 사람’이라고 소개하는 저자는 파리 사회과학고등연구원(EHESS)에서 사회학을 전공하면서 인문학에도 깊은 관심을 기울여왔다. 2002년 훌쩍 서울을 떠나 파리로 갔다가 2012년 다시 서울로 돌아온 그가 그간 펴낸 책에는 『파리를 생각한다-도시 걷기의 인문학』, 『파리의 장소들-기억과 풍경의 도시미학』 등이 있다. ‘예술로서의 사회학’을 지향하는 모든 사람을 위해 글을 써왔던 그의 이번 책의 주제는 ‘책읽는 사람’일 것이다. 꽃피는 봄, 책읽는 문화의 깊이를 생각하면서 『책인시공』의 주요 대목을 발췌했다.

책의 메타포
책은 진리나 의미를 담고 있는 매체이기에 앞서 종이와 잉크로 만들어진 하나의 물건이다. 책은 살 때는 비싸지만 다시 팔 때는 거의 값이 나가지 않는 물건이다. 그런데 절판된 희귀본을 사려면 정가보다 훨씬 더 비싼 값을 치러야 하는 경우도 있다. 크기에 비해서는 무게가 많이 나가고 먼지를 뒤집어쓰기도 하며 습기와 불에 약하다. 한번 불어나기 시작하면 계속 늘어나 점차 집 안의 모든 벽을 점령해버리기도 한다. 그러나 책은 하나의 물건이면서 동시에 그 이상이다. 책을 읽고 있는 사람들에게 “당신에게 책은 무엇입니까?”라고 물으면 그들은 각자 자기 나름대로 메타포를 사용해 책에 대한 생각을 표현한다.

수많은 독자와 저자가 책에 대한 생각을 메타포로 표현한 것을 찬찬히 살펴보면 자주 등장하는 메타포들이 있다. 그것들을 몇 개의 범주로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지식과 정보의 원천, 절망의 치료제, 다양한 도구, 생각의 집, 저자의 자식. 책이 좋아 서재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는 사람을 서재인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서재인은 책을 펴는 순간 독서인이 된다. 서재는 세상의 모든 일을 뒤로하고 정신을 정화하는 집 안의 성역이다. 집 밖에서 일하다가 집으로 돌아와 서재에 들어서는 순간, 서재인의 정신은 다시 어머니의 자궁 속으로 들어간 것처럼 편안해진다. 그곳은 안전하게 보호받는 장소이며 생각이 잉태되고 자라는 장소다.

아무리 바깥일에 시달렸어도 서재의 책상 앞에 앉으면 안도의 한숨이 나온다. 그래서 한 재일동포 학자는 이런 시를 썼다. “모두 깊이 잠들어/적막해오는 이 시각에//이렇게 혼자 앉으면/비로소 하루의 평온이 찾아온다.”―윤건차, 「내 책상」 중에서 서재는 정신적 삶의 공간이다. 서재는 책을 읽는 공간일 뿐만 아니라 책을 쓰는 공간이기도 하다. 르네상스 시기 독일의 화가 알브레히트 뒤러가 그린, 성 제롬이 서재에서 연구에 몰두하고 있는 그림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성자의 머리 뒤편으로 아우라가 빛나고 그의 책상 오른쪽 진열대에는 두개골이 놓여 있다.

성 제롬은 온갖 세상일을 뒤로하고 홀로 서재에 앉아 히브리어 성서를 읽고 연구하면서 라틴어로 번역하는 막중한 작업을 수행했다. 어디 성 제롬뿐이던가. 몽테뉴는 세상과 분리된 성의 탑에 서재를 마련하고 그곳에 홀로 들어앉아 책을 읽고 사색에 잠기고 집필에 몰두했다. 서재는 그가 선택한 가장 확실한 삶의 공간이었다.

서재인의 삶과 죽음
몽테뉴 전기를 쓴 작가 슈테판 츠바이크도 서재인이었다. 그는 나치의 박해를 피해 브라질로 망명해 그곳에서 생의 마지막 나날을 보냈다. 망명자는 안전했지만 그의 삶의 터전이었던 서재는 더 이상 없었다. 타국 땅에서 외로움이 더해갈수록 비엔나의 서재가 생각이 났다. 그는 서재 없이 살 수 없는 서재인이었다. 외로움을 견디지 못하던 그는 결국 사랑하는 부인과 동반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평생의 독서
독서는 종교와 수도생활에서 빼놓을 수 없는 요소이기도 하다. 성서와 불경과 코란 읽기 없는 기독교와 불교와 이슬람교는 생각할 수 없다. 작가 김동리는 자신을 찾아온 문학지망생들에게 글을 쓰려면 “성경을 많이 읽고 죽음을 생각하라”고 말했다고 한다. 어디 성서뿐이겠는가. 코란, 『논어』, 『금강경』 등 인류의 지혜가 담긴 종교적 경전을 두루 읽는다면 나이들수록 더욱 원숙한 삶을 살면서 다음 세대에게 삶의 지혜를 전달하는 역할을 담당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우리는 누구라도 독서하는 습관을 기르면 독서를 통해 매일 눈이 밝아지고 새사람이 되는 체험을 할 수 있다.

인간이란 몸은 성장을 멈추지만 정신은 죽는 날까지 계속 성장하는 신통한 나무와 같다. 시력이 떨어지면 안경과 돋보기를 사용하면 되고 실명이 되면 다른 사람에게 낭독을 부탁할 수도 있다. 인생 사계의 독서체험은 어린 시절의 듣기에서 시작해서 읽기를 거쳐 노년에 이르러 다시 듣기로 끝나게 된다. 사철이 순환하듯 듣기와 읽기도 서로 꼬리를 물며 순환한다.

어떻게 보면 인생은 여러 개의 장들로 구성된 한 권의 책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책과 마찬가지로 인생도 한 장이 끝나면 다음 장으로 넘어간다. 인생이 책과 같다면 인생을 의미 있게 산다는 것은 책을 한 장 한 장 써가면서 더욱 생생하고 감동적인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일이다. 점점 더 체계와 일관성을 갖춰가는, 그리고 남들에게 감동을 주는 책을 쓰려고 노력하는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간다면 그 인생은 한 권의 좋은 책으로 남을 것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