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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로칼럼_ 말의 힘, 얼의 힘
원로칼럼_ 말의 힘, 얼의 힘
  • 손동현 성균관대 명예교수·철학
  • 승인 2013.03.05 1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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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동현  성균관대 명예교수(대교협 부설 한국교양기초교육원장)

근년 들어 대학마다‘국제화’의 열풍이 요란하다. 실은 ‘세계화’가 이 시대의 세계사적 중심 조류라는 걸 아무도 의심하지 않으니 대학의 교육이 그에 대처해야 함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대학 현장에서 보면 ‘국제화’라는 이 표현의 직접적 표면적 의미 때문에 오해와 왜곡이 꽤 있는 것 같다. 그 말의 내면적 지향적 의미, 즉 궁극적 목표는 뒷전으로 밀리고 말이다. 대학 평가를 염두에 두고 소위 국제화 지수(?)를 높이기 위해 대학마다 안간힘을 쓰고 있는 게 실은 문제다.

‘국제 학술지’에 논문 게재하는 것을 의무화 내지 강력 권장하는 일, 국제 학술대회에 참석하거나 그런 학회를 유치하도록 인센티브를 줘가며 적극 권장하는 일, ‘국제어’로 행해지는 강의를 확대시키는 일, 아예 외국인 교수와 외국인 학생을 대거 유치하는 일 등 그 자체로선 모두 바람직한 일로 보인다. 국제적 수준의 연구, 그리고 국제적 수준의 교육을 달성해 세계 무대 어디에 나가서도 뒤지지 않는 연구 성과를 내고 또 세계 어느 나라 학생과 견줘도 뒤떨어지지 않는 실력을 갖춘 학생을 양성하자는 게 ‘국제화’의 기본 취지이니까 말이다.

그러나 이른바 ‘국제어’ 강의의 확대에 관해서는 진지하게 검토해야 할 문제가 있다. 아직 지적으로 성장하고 있는 미래세대의 교육 문제라 그렇다. 대학마다 교수는 강의 담당에서, 학생은 수강에서 일정량 이상을 국제어 강의로 채워야 하도록 규정하는 게 보통인데, 국제어 강의를 교육내용 및 교육대상별로 차별화하지 않고 이렇게 획일적으로 그 분담 총량만 생각한다면 큰 문제다.

사람들은 대개, 세계는 독자적으로 밖에 있으며, 우리가 쓰는 말은 그 세계를 지칭하기 위해 동원한 것으로써 그 세계를 모사하고 반영할 뿐이라고 생각한다. 사물이 먼저 있고 언어는 나중에 그걸 지칭하거나 표현할 뿐이라는 거다. 그러나 문화생활의 속내를 좀 더 깊이 들여다보면 사정은 그렇질 않다. 우선 첫 단계로, 말을 알아야 그 말로 지칭되는 대상을 알 수 있다는 생각을 해보자. 그 대상이라는 게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물건이 아니라 자유니 평등이니 하는 추상적인 사상이라면, 이런 말을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 자유나 평등의 이념을 이해하고 그런 이념이 실현되는 세계를 머릿속에 그리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런 이념의 실현을 위해 실천적 행위를 한다는 것은 물론 불가능할 것이다. 문화적 삶의 세계는 따지고 보면 이렇게 ‘개념’들로 구성된 세계다. 그런 세계를 이해하고 구성해 내려면 그런 세계를 구성하는 토대요 요소가 되는 개념이 머릿속에 영글어 있어야 한다.

대학이 다루는 탐구의 대상세계야말로 개념으로 구성되는 고차원의 문화 세계다. 고등교육의 내용 또한 이런 것일 수밖에 없고 이런 것이어야 한다. 그런데 이 개념에는 분명 문화적 역사적 경험이 축적돼 있기 마련이다. 그렇지 않은 개념은 공허한 것으로 곧 사라지거나 세계구성에서 힘을 쓰지 못한다.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 설파한 철학자(하이데거)를 들먹일 필요도 없이 인문사회과학 분야에서 이는 기본 상식이다. 따라서 한국인의 세계를 구성하는 것은 한국어에 담기는 것이지 다른 외국어에 담길 수가 없다. 영어로만 이 개념세계를 이해하고 구성하는 데 익숙한 재미동포가 있다면 그는 생물학적으로만 한국인이고 문화적으로는 영미권 사람이라고 해야 옳다.

대학에 막 입학한 학생은 실은 개념적 사고의 훈련을 막 시작하는 사람들이다. 중등교육과 고등교육의 중요한 차이는 개념적 사고를 조직적 체계적으로 하는 사고교육의 유무에 달려있다고 할 수 있다. 말의 힘이 곧 정신의 힘, 얼의 힘인 거다. 그러니 ‘국제화’의 명분 아래 (주로) 영어로 개념적 사고를 시작한다면 그 학생은 장차 한국의 역사와 문화를 이해하고 이를 살찌우며 한국의 문화적 발전을 이끌어갈 문화적 힘을 키우지 못할 것이다. 한국의 대학에서 고등교육을 받은 한국 대학생이 한국을 모르고 한국문화를 성장시킬 힘이 없는 이방인이 된다? 이 무슨 해괴한 아이러니인가. 제발 저학년에서, 특히 인문사회과학 분야에서, 어설프게 국제어 강의를 시행하는 일은 이 대학 저 대학 가릴 것 없이 당장 멈춰야 할 일이다.

손동현 성균관대 명예교수·철학/한국대학교육협의회 부설 한국교양기초교육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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