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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섭 앞세운 혁신의 여정이 되려면
통섭 앞세운 혁신의 여정이 되려면
  • 김재호 학술객원기자
  • 승인 2013.02.25 15:3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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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워드로 읽는 과학本色 2_ 미래창조과학부

“과학은 차라리 인문학이다.” 최재천 이화여대 석좌교수(행동생태학)는 지난해 말 한 일간지에 기고한 칼럼에서 기초학문으로서의 과학을 강조하며 이렇게 표현했다. 과학은 “삶을 보다 의미 있게 하는 것이 과학의 목적이라면”이라는 전제가 그 앞에 있다. ‘풍요롭게’가 아니라 ‘의미 있게’라는 표현이 의미심장하다. 그는 미래창조과학부는 ‘미래창조기술부’가 되어야 하고, ‘기초과학부’를 신설하자고 제안했다. 정부조직개편안 국회 처리가 난항을 겪고 있다. 여야뿐만 아니라 각 전문가들조차 공룡부처 탄생에 대해 기대 반 우려 반이다. 하지만 미래창조과학부는 어떤 식으로든 새 정부와 함께 들어설 것이다.

미래창조과학부는 과학기술, ICT와 방송통신의 기능을 핵심으로 맡는다. 교육과 과학의 융합에서, 과학과 산업의 통섭으로 바뀌었다. 그렇다면 미래와 창조, 과학의 만남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까? ‘미래창조과학부’ 이름만 보면, 우리의 미래가 과학기술을 토대로 한 창조적 산업경제에 달려 있는 것 같다. 그러나 과학은 경제가 아니다. 경제를 위한 도구는 더더욱 아니다. 과학은 인류의 지식을 넓혀가는 주요한 방법론이다. <뉴욕타임스>에는 “과학이 경제성장의 핵심이다(Science Is the Key to Growth).”가 실렸다.(2012년 10월 28일자.) 클린턴 정부에서 미국 과학기술 자문관을 지낸 닐 레인(Neal Lane)은 과학기술에 대한 투자가 경제성장과 연관된다고 주장한다. R&D 특히 기초연구에 대한 투자가 과학적 발견을 가능하게 한다. 이러한 발견은 산업으로 응용되어 제품으로 팔리는 것이다. 일자리 창출은 물론이다.

하지만 워싱톤포스트가 운영하는 뉴스 웹사이트 슬레이트(www.slate.com)에 실린 “과학은 경제성장이 아니라 과학 자체를 위해 존재한다.(Science Is the Key to Science, Not to Economic Growth)”는 글은 다른 생각을 개진한다. 기초연구에 대한 투자는 수년이 걸려서야 산업에 적용될 수 있다. 실제로 미국 과학재단이 발표하는 <Science and Engineering Indicators 2012>에 따르면, 2000년 중반 5년간 미국의 R&D 지출은 연평균 5.8%씩 늘어났지만, 이 당시 경기는 오히려 안 좋아졌다.

기초 연구에 대한 투자는 두말할 나위 없이 중요하다. 지금 예산보다 더 기초연구에 투자해야 한다. 하지만 솔직히 생각해보았을 때, 이러한 연구가 경제 성장과 일자리 창출에 얼마만큼 연관이 있는지는 미지수라는 것. 과학이 경제성장의 핵심이라는 논리는 무섭다. 왜냐하면 다음과 같은 결론을 도출하기 때문이다. 1) 과학이 경제성장을 이끌 것이라는 당신의 약속 때문에 우리는 과학에 투자했다. 2) (실제 경기 지수를 파악해보니) 경제성장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3) 그러므로, 과학 관련 예산을 삭감해야 한다.

지금보다 더 기초연구에 투자할 때
더 나아가 ‘과학’ 하면 왠지 필연적이고, 오류 불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오히려 과학은 오류 가능하며 때론 우연적이다. 뢴트겐선이라고도 불리는 X선은 우연히 발견됐다. 또한 빛은 입자설에서 파동 이론으로 설명되다가 이제는 둘 다를 수용한다. 포퍼는 과학과 사이비 과학을 구획(demarcation)한다. 논리실증주의자에겐 경험에 의한 ‘검증’이 가능해야 의미가 있고 과학이 된다.

하지만 포퍼에겐 ‘반증’ 혹은 ‘논박’ 가능해야 과학이다. 필연성과 오류 불가능성만으론 창조를 이끌어낼 수 없다. 때론 우연을 찾아 떠나는 모험을 강행해야 한다. “어떤 세대는 창조하기 위해 태어나고 또 다른 세대는 문명을 유지하기 위해 태어난다.” 앨빈 토플러의 말이다. 토플러의 창조는 정치적 창조에 가까울 수 있다. 그래도 창조의 정신은 전복이다. 그런데 새 정부의 기치는 창조경제이다. 과학이 경제일 수 없듯이, 창조 역시 경제일 수 없다. 창조는 경제적 성과를 필연적으로 수반하지 않는다. 창조를 정형화하여 경제적으로 계량화하는 순간 창조성은 사라진다. 창조의 정신과 경제적 극대화에는 괴리가 있다.

미래를 뜻하는 future의 어원은 14세기 경 중세 영어인 futur이다. 앵글로 프랑스말인 futur는 라틴어 futurus에서 기원했다. futurus는 ‘그렇게 될 것이다(about to be)’라는 뜻이다. 명사로서 future는 라틴어 futura을 본 떠 만들었다. 응당 그렇게 될 실체가 요구된다.

 미래에 대비되는 개념은 일상적으로 생각하듯 과거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어원이 언급하듯이, 그렇게 되지 않도록 혹은 그렇게 될 수 있도록 만들어 가는 것, 그게 바로 미래이다. ‘미래창조과학’에서 미래가 지향하는 바는 극복해야 할 구태일 것이다. 그것은 또 다른 이름으로, 혁신이자, 여정이다. 성과 중심의 실용성이라는 종착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래야 과학에 기반 한 창조경제가 가능해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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