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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역사교과서문제, 어떻게 볼것인가
[기획특집] 역사교과서문제, 어떻게 볼것인가
  • 전미영 기자
  • 승인 2002.08.26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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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적미화” 언론 집중포화에 정치권 가세…검정위원 사퇴
역사교과서 문제 어떻게 진행됐나

7월말부터 시작된 이른바 ‘역사교과서 파문’은 열흘 남짓 언론과 정치권을 달구다가 일단 소강상태에 접어든 것으로 보인다. 역사교과서 파문은 지난 달 30일 경향신문, 국민일보, 동아일보, 한국일보 등에서 2003학년도 중·고등학교 교과서 문제를 일제히 다루면서 시작됐다.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이 29일 발표한 2003학년도 합격판정 교과서 가운데 근현대사를 다룬 4개의 역사 교과서를 비판하고 나선 것.

7차 교육과정에 맞춰 사상 처음으로 국정교과서에서 검인정 선택교과서로 민간 발행된 고등학교 2, 3학년 역사교과서 가운데 논란을 불러일으킨 교과서는 금성출판사, 대한교과서, 두산, 중앙교육진흥연구소에서 발행한 것으로, 문제 대목은 김영삼 정부와 김대중 정부의 평가 부분. 신문들은 “일부 교과서가 김영삼 정부를 비리와 대형 사고로 얼룩진 정권으로 묘사하면서 평가절하한 반면, 김대중 정부 부분에서는 개혁과 남북화해, 노벨상 수상 등을 집중 부각시켰다”며 비판하고 나섰다.

8월 1일 이후 동아일보, 세계일보, 중앙일보, 조선일보 등은 기사 뿐 아니라 사설, 시론, 칼럼, 독자편지 등 동원할 수 있는 신문의 면을 총동원해 집중 비판하고 나섰다. ‘교과서가 정권의 선전도구인가’, ‘교과서가 홍보물인가’ 등의 칼럼과 사설을 통해 ‘치적’과 ‘미화’의 표현을 극대화시키며 비판하고 나섰고, 교과서 검정 시스템과 이를 감독하는 교육당국의 인식까지 문제가 있다고 지적하고 나섰다.

언론 보도 하루만에 역사교과서 문제는 곧바로 정치권의 공방으로 이어졌다. 한나라당은 즉각 “역사 왜곡은 묵과할 수 없다”는 입장을 밝히면서 대변인 논평을 통해 “역사 왜곡은 범죄 행위로, 군사독재 시절에나 있었던 용납할 수 없는 일”이라며, “정부는 문제가 된 교과서의 검정을 즉각 철회하고 왜곡된 내용을 바로잡아라”라고 요구하는 등 강하게 비판하고 나섰다. 민주당 또한 대변인 논평을 통해 “교과서 기술은 정확성과 균형이 매우 필요하며, 더욱이 현존 인물과 진행 중인 사건에 대해서는 신중하게 평가하고 기술하는 것이 당연하다”면서 “형평성 시비가 제기된 것은 잘못된 일로 적절한 조치가 뒤따라야 한다”고 말하는 등 여야를 막론하고 역사교과서 문제를 지적하고 나섰다.

한나라당은 1일 검정위원 선정과정에 의혹을 제기하고 국정조사를 추진하고 있다고 밝혔고, 국회는 6일 교육위원회를 열어 역사 교과서 편향기술 논란 조사를 위한 ‘역사 교과서 진상조사 특위’ 구성을 밝혔다. 민주당 2명, 자민련 1명, 한나라당 3명으로 구성해 월말까지 활동하겠다는 것.

역사 교과서 문제는 역사 서술의 하한선 문제로 이어졌다. 대부분의 신문들은 역사학자들의 이름을 빌어 “당대사 서술은 섣부른 일”이며, 원칙적으로 당대사는 기술할 수 없다는 주장을 앵무새처럼 되풀이했다. 그러나 본지가 역사학 전공 교수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전화설문조사에 따르면 “역사는 현재를 이해하는 것이기에, 당대사 부분까지 다뤄야 한다”고 응답한 교수들도 상당수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천편일률적인 언론의 비판과 공방 속에서 ‘교과서 서술 내용’에 대한 시비는 학술적인 틀을 뛰어넘어 정치공세로 이어지는 양상을 띠면서 검정제도와 검정위원의 공정성 시비로까지 이어졌다. 조선일보는 급기야 2일 검정위원 명단을 입수 공개했고, 검정위원 선정과정에 교육인적자원부가 관여한 ‘경위’를 문제삼고 나섰다. 검정위원 명단 공개는 결국 전원 사퇴라는 결과로 이어졌다.

지난 3일 10명의 검정위원들은 “명단공개로 공정한 검정이 불가능해졌다”며 전원 사퇴를 발표한 뒤 ‘한국근·현대사 검정교과서를 둘러싼 논란에 대한 우리의 입장’이라는 제목의 성명을 발표했다. 이들은 “국정과 무슨 차이가 있느냐”며 검인정 제도에 대해 의혹을 제기하고 있는 언론에 대한 강한 불만을 표시했다. “일부 언론과 정치인들이 검정제도의 취지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고 명단 공개를 요구하여, 그 결과 검정제도의 근간인 ‘비공개’ 원칙을 무너뜨린 데 대해 유감스럽게 생각한다”고 밝힌 검정위원들은 교과서의 제도 변화를 미흡하나마 ‘진일보한 것’으로 평가했다. 또한 “검인정제도의 기본취지에 따라, 가급적 교과서 집필자들의 서술을 존중하고 수정·보완요구는 최소한의 선에 그쳐야 한다는 인식을 갖고 있었다”고 주장했다. “몇 차례의 회의에서 이번 논란을 빚고 있는 현 정권 서술 부분에 대한 문제 제기는 없었”으며, 교육부 관계자도 직접적으로 개입하거나 하지 않았다는 것.

검정위원으로 참여했던 박찬승 충남대 교수(사학과)는 “검인정제도의 취지를 잘 이해하지 못해서 정부에서 다 틀어쥔 것처럼 오해한 데서 문제가 시작됐다”고 지적하면서, “내용은 집필자들이 쓰기 때문에 정작 검정위원들이 개입할 수 있는 여지는 많지 않다. 그런데 언론에서는 마치 검정위원들에 특별한 문제가 있는 것처럼 보도했다”라고 밝혔다.

역사교과서 문제는 검정위원 사퇴와 함께 일단 잠잠해진 것처럼 보인다. 그토록 들끓던 언론은 국회조사나 검정위원 재위촉 작업에 대한 언급을 하지 않고 있다.

이런 와중에 정작 역사학자들은 이 문제에 대해 잘 모르고 있거나, 설사 안다고 해도 근본적인 해결책을 제시하지는 못하고 있다. 역사교과서 문제에 대한 학회 차원의 논의나 합의가 없는 상황에서 역사학자들이 개입하는 방식은 ‘개인적으로’ 일간지 칼럼에 기고를 하거나, 이름을 빌려주는 식으로 진행돼왔다. 교과서가 어차피 ‘경전’이 아닌 바에야 내용의 편파성이나 집필자의 의도는 젖혀두고라도, 근본 문제로 불거진 당대사 서술에 대한 역사학계의 논의과정은 절실해 보인다.

전미영 기자 neruda73@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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