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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기록한 그 자신, 역사가 되다
역사를 기록한 그 자신, 역사가 되다
  • 장문석 영남대·사학
  • 승인 2012.12.26 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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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의 상징적 죽음, 홉스봄이 남긴 유산

“베르디가 죽었다!”이탈리아 영화감독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의 걸작「1900년」의 첫 장면에 나오는 외침이다. 19세기 이탈리아 민족 부흥을 상징하는 음악가 주세페 베르디의 죽음은 19세기가 문을 닫고 20세기가 문을 여는 하나의 상징적 죽음이었다. 역사가 에릭 홉스봄의 사망 소식을 듣고 문득 이 장면이 떠올랐다. “홉스봄이 죽었다!”그의 죽음도 어쩌면 20세기와 21세기를 나누는 상징적 전환점이 아닐까? 물론 일어난 일을 밖에서 관찰하는 한 역사가의 죽음을 두고 그렇게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그는 20세기를 몸으로 겪었고, 자신이 겪은 일을 이해하기 위해 20세기와 그 기원들을 손으로 기록했다. 그의 진지함과 탁월함으로 인해‘역사가’가‘역사’가 되는 반전이 가능한지도 모른다.

‘사건’이 된 역사가의 죽음

실제로 홉스봄의 사망에 일제히 전 세계의 언론이 반응했고, 영국 일간지들에는 사망 소식이 제1면에 오르기도 했다. 역사를 기록한 홉스봄 그 자신이 역사라는 사실은 언론의 뜨거운 관심으로 입증될 수 있다. 과연 한 역사가의 죽음이 사건이 되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다. 그러나 드문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 그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일단 그 역사가가 무엇을, 어떻게 썼는지 알아야 한다. 다행히 우리에게 홉스봄의 책들은 대부분 번역 소개돼 친숙하다.

우리 사회에 홉스봄이 활발히 소개된 것은 무엇보다 그의 이력에 꼬리표처럼 따라다닌 명성, 즉‘20세기가 낳은 가장 위대한 마르크스주의 역사가’라는 명성 때문이 아니었을까 한다. 홉스봄이 우리에게 다가왔던 무렵, 우리는 마르크스주의에 갈증이 있었고, 마르크스주의적 시각에서 쓴 역사에 궁금증이 있었다. 홉스봄은 망각된 보통사람들에 대한‘밑으로부터의 역사’를 제시했고, 이탈리아 비적들과 영국 제화공들의 삶이 그의 손끝에서 되살아났다. 우리에게 그의 가르침은‘민중사’나‘사회사’의 가능성을 보여줬다. 그러나 우리가 더 잘 배웠어야 했지만 아쉽게도 잘 배우지 못한 것은‘밑으로부터의 역사’만큼이나‘전체 사회의 역사’가 필요하다는 그의 가르침이었다. 밑을 보되, 밑에서 위로 보는 역사 또 한 필요하다는 그의 생각은 알려졌으되, 잘 구현되지 못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를 아우르는‘전체 사회의 역사’를 쓰기 위해서는 그만큼의 넓은 시야와 공정한 시각이 필요하다.

홉스봄은 평생 마르크스주의자를 자처했지만, 그의 역사 유물론은 유연했다. 그는 진보를 바랐지만, 역사가 항상 진보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것은 때때로‘야만’으로 회귀할 수도 있었다. 또한 그는 진보가‘나쁜 편’에 의해서도 이루어질 수 있다는 점을 인정했다. 그는 자본주의를 부정적으로만 보는 태도를 낭만주의로, 긍정적으로만 보는 태도를 부르주아 실용주의로 간주하면서 자본주의를 창조적 파괴의 모순적 과정으로 봤다. 자본주의는 어떤 면에서 최악이지만, 다른 면에서 최선이라는 그의 모순적 시각은 심사숙고할 가치가 있다.

홉스봄은 마르크스주의 이론에 필요 이상으로 집착하지 않았다. 그는 또 한 명의 빼어난 마르크스주의 역사가 E. P. 톰슨이 루이 알튀세르와의 이론 논쟁에 시간을 허비하는 것을 안타깝게 여겼다. 그럴 시간이 있으면 역사를 쓰는 것이 나았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잘 기억되는 홉스봄의 책도 이론서가 아니라 역사서이다.『 혁명의시대』,『 자본의시대』,『 제국의 시대』로 이어진 19세기 3부작, 나아가 20세기를 다룬『극단의 시대』를 포함한 역사 4부작이 그것이다. 웬만한 지식인의 서가에 예외 없이 꽂혀있을 이 책들은 서양사의 교과서로 통했다. 그가 4부작에서 제시한‘긴 19세기’와‘짧은 20세기’의 시기 구분들과 시민 혁명 및 산업 혁명을‘이중 혁명’으로 파악하는 시각은 우리의 역사 인식에 큰 영향을 미쳤다. 4부작이 전부가 아니다. 목마른 자가 우물을 파듯이, 홉스봄은 어떤 주제에 갈증이 있으면 어김없이 나타나 우물을 팠다. 민족주의도 그 우물들 중 하나이며, 지금도 사람들은 여기서 목을 축인다. 그는 『만들어진 전통』에서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민족의 전통들이 실은 최근에 발명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처음에는 낯설었던‘전통의 발명’은 이제 상투어가 됐다. 또한 그는『1780년 이후의 민족과 민족주의』에서 민족주의를 위가 아니라 밑에서 보면 그 속에 담긴 사회 개혁에 대한 대중의 열망을 이해할 수 있다고 역설했다. 이는 사회주의가 민족주의의 밖이 아니라 안에 있는 어떤 경향일 수 있음을 암시한다. 이렇듯 홉스봄은 민족주의의 위와 밑, 안과 밖을 두루 고찰함으로써 민족주의에 대한 새로운 통찰로 우리를 이끌었다.

‘민족주의의 황혼’ 예측 빗나가다

물론 홉스봄의 예측은 자주 틀렸다. 그가 민족주의의 황혼을 선포하자마자 구 유고슬라비아 등지에서 민족주의가 격렬하게 분출했다. 그가 이탈리아 공산주의야말로 서유럽에서 가장 전도유망한 좌파 세력이라고 단언했을 때 이탈리아 좌파는 속절없이 무너지고 있었다. 따라서 그의 점괘를 믿는 사람은 낭패를 보기 십상이다. 그러나‘HOBSBAUM’이 공무원의 실수로‘HOBSBAWM’이 되었다고 다시 원래대로 표기하지 않듯이, 홉스봄이 잘못 예측했다고 그의 역사를 고쳐 쓸 필요는 없다. 그의 틀린 예측도 그것대로 역사인 것이다. 홉스봄의 강점은 자신의 예측이 틀렸어도 당당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예측할 충분한 근거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홉스봄이 남긴 막대한 유산 앞에 망연히 서 있다. 누군가는 그의 유산을 감정할 것이고, 누군가는 그의 유산 상속자임을 자처할 것이다. 여기서 누군가는 마르크스주의자일 수도 있고 반마르크스주의자일 수도 있다. 그러나 감정하기 전에 음미해야 하고, 독점하기보다 공유해야 한다. 이를테면 자본주의는 순수하게 자본주의적이지 않았기에 성공할 수 있었다는 그의 통찰이 마르크스주의적인가 아닌가를 따져본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 그런 통찰은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에 대한 통렬한 비판일 수도 있고, 위기에 빠진 자본주의의 회생을 돕는 탁월한 조언일 수도 있다. 다만 홉스봄이 줄곧 견지한 입장은 마르크스를 모르는 것보다 아는 것이 훨씬 더 깊이 있고 설득력 있는 견해를 형성한다는 점이었다. 그의 책이 마르크스주의의 수용 여부와 상관없이 마르크스가 우리 시대의 지적 전통이자 교양임을 실증하는 증거이다.

그러나 홉스봄에게서 정말로 배워야 할 것은 그의 마르크스주의가 아니라 (그 자신의 표현을 빌리면) “가장 별스럽고 끔찍한 한 세기”를 뚫고 살아온 역사가의 태도이다. 홉스봄은 자서전에서 20세기 이탈리아의 가장 빼어난 작품으로 이탈로 칼비노의『보이지 않는 도시들』을 꼽았다. 이 소설에서 마르코 폴로는 쿠빌라이에게 우리의 일상이 지옥이라면서 지옥을 견디는 법 두 가지를 말한다. 하나는 스스로 지옥의 일부가 되는 것이다. 이는 가장 쉬운 방법이다. 다른 하나는 지옥의 한복판에서 지옥이 아닌 것을 찾아내는 것이다. 이는 매우 어려운 방법인데, 이를 위해서는 늘 깨어 있어야 하고 배워야 한다. 이 두 번째 방법이야말로 홉스봄이 마지막 저서에서 던진 “세상을 어떻게 바꿀 것인가?”에 대한 해답처럼 보인다. 그리고 홉스봄 자신이 세상에 대한 왕성한 호기심으로 시대의 모험을 무수한 이야기로 풀어낸 20세기의 마르코 폴로였다.


장문석 영남대·사학
필자는 서울대에서 박사를 했다. 저서로『민족주의 길들이기』, 『파시즘』, 역서로『제국의 지배』, 논문으로는「기업가의 사회적 이상: 비토리오 발레타의 경우」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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