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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용주의, 어떤 철학에도 없는 진보적 씨앗 함축했다
실용주의, 어떤 철학에도 없는 진보적 씨앗 함축했다
  • 교수신문
  • 승인 2012.12.10 1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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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말하다_ 로베르토 웅거 지음, 『주체의 각성-사회개혁의 철학적 문법』 이재승 옮김|앨피|468쪽 |19,800원

로베르토 웅거(Roberto Unger, 1947~ )는 하버드 로스쿨의 법철학 교수이자 브라질의 정치인이다. 브라질의 유명한 정치가문의 후예인 그는 29세인 1976년에 하버드 로스쿨의 종신교수가 됐으며, 2000년에는 하버드대 로스코 파운드 석좌 교수가 됐다. 그는 던컨 케네디, 모튼 호위츠와 더불어 70년대 후반에 미국에서 비판법학을 창설한 뉴레프트 사상가이다. 1천 쪽에 달하는 『정치학』 3부작(1987년)은 웅거의 대표작이다. 웅거는 70년대 후반부터 진보적 대안을 제시하며 브라질의 현실정치에 깊이 관여하고 있다. 2006년에는 대통령 선거에 출마를 시도하기도 했으며, 룰라 대통령의 2기 행정부에서 장기계획부 장관을 역임하기도 했다. 『주체의 각성』은 무엇을 말하는가. 이 책은 원래‘무제약적 실용주의(pragmatism unbound)’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하지만 누가 실용주의를 두려워하랴! 실용주의는 보수정치가들조차 집권플랜의 포장지로 사용할 정도로 허접한 것이 됐으니 말이다. 그런데도 웅거는 다른 어떤 철학적 입장도 갖지 못한 진보적 씨앗을 실용주의가 함축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웅거는 실용주의가 상정하는 행위주체성, 우연성, 미래지향성, 실험주의의 정신을 구출해 이를 사회변혁과 인간해방의 지렛대로 사용하자고 제안하다. 그는 여기에서 억누를 수 없는 예언가적 기상을 발산한다. 웅거는 네 가지 씨앗을 활성화시켜 인간을 변혁의 주체로 각성시키고, 현재의 제도와 구조를 영구적으로 혁신할 것을 주장하고 있다.

웅거는 형이상학에서 시작해 사회사상에 이르기까지 급진적 실용주의와 양립할 수 없는 사고방식들을 조목조목 비판한다. 특히 대의민주주의를 민주주의의 결정판이라거나 시장경제를 자연적이고 필연적인 질서로 수용하는 사고방식을 ‘민주적 완전주의’나 ‘제도적 물신숭배’라고 비판한다. 나아가 사회와 역사의 특수한 심층적 구조가 존재하고 이러한 구조들이 필연적인 법칙을 갖는다는 사고도 사이비 필연성이라며 단호하게 거부한다.

정치적 혁명 거부하고 영구혁명 주장
이 점에서 웅거는 자신을 지배적인 자유주의자들뿐만 아니라 마르크스주의자들과 차별화한다. 본디 자유주의나 사회주의가 동일하게 인간해방에 기여하겠다고 해놓고 필연성을 인정함으로써 인간의 변혁의지를 꺾어놓았다고 비판한다. 나아가 웅거는 대전복으로서 정치적 혁명을 거부하고, 대신에 영구혁명을 주장한다. 혁명은 점진적이고 단계적으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어떠한 사회나 구조이든지 인간의 실험 대상에서 배제되거나 특권화될 수 없다는 것이다. 웅거는 변혁적 실천과 관련해서‘맥락(구조) 보존적인 활동과 맥락 변혁적인 활동’의 격차를 해소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웅거는 이러한 두 활동의 관계와 그 성격을 변화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두 활동 사이에 간격을 줄이고 구조에 대한 투쟁이 구조 안에서의 투쟁의 연장이 돼야 한다는 것이다. 양자간의 격차를 줄이게 되면 변혁이 매우 일상적으로 이뤄지고, 개혁의 비용도 그만큼 적어진다는 것이다. 웅거는 위기가 없더라도 개혁을 일상적으로 수행할 수 있게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구조가 갖춰진다면, 웅거가 말하는 민주적 실험주의의 맥박이 뛰는 사회가 된 것이다. 웅거는 사회민주주의 체제를 혁신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웅거는 ①노동시장의 불안정에 대한 노동자의 보호, ②자본시장의 불안정성에 대한 생산적 자산의 보호, ③소시민계급의 보호, ④가족기업의 보호, ⑤중앙과 지방 및 기업과 노동자간의 사회협정, ⑥조세를 통한 소득재분배 등을 사회민주주의 원칙이라고 꼽는다. 웅거의 판단에 따르면, 유럽의 사회민주주의는 여섯 번째 방침을 유지하기 위하여 나머지 모든 원칙에서 후퇴했다. 웅거는 사회민주주의 체제의 문제점으로 세 가지를 지적한다.

첫째, 선진적인 경제부문에 대한 진입장벽이 높다는 점, 둘째로 사회연대가 전반적으로 부족하다는 점, 셋째로, 보통사람들에게 꿈과 이상과 관련해서 탈출구 없다는 점을 거론한다. 그는 진입장벽을 완화시키는 사회적 유연성의 확보, 연대를 활성하고 이를 위해 돌봄경제의 개발, 나아가 아동들에 대한 예언자적 교육과 보통사람들에 대한 평생교육과 권한강화(empowerment)를 강조한다. 그는 경쟁에서 낙오한 사람들에게 사회적 권리와 최저소득을 보장하는 것은 불가피하지만 구조의 경직성이나 폐해는 방치하고 오로지 이전지출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는 현재의 추세는 지속가능성이 없다고 단언한다. 나아가 다양한 소유와 생산 체제를 확립하고 소규모 기업 소생산자의 경제적 독립을 강조하고 있다.

혁신된 사회민주주의 체제는 엘리트의 권위가 아니라 보통사람들의 위대함이 중심이 돼야야 한다고 주장한다. 웅거는 이 책의 전제를, 개인으로서뿐만 아니라 집단으로서도 인간의 무한성이라고 밝힌다. 웅거는 이를 위해 뇌과학과 심리학의 성과들을 차용하고 있다. 웅거는 ‘부정의 역량’, ‘회귀 능력’, 뇌의 가소성과 ‘이산적 무한성(discrete infinity)’을 인간 정신의 징표로 강조한다. 인간은 유기체로서 필멸의 존재이지만 무한한 잠재력과 창의성을 가진 존재이다. 인간과 구조의 관계에 대하여 구조는 유한하고, 인간은 무한하다고 말한다.

개인·집단으로서 ‘인간’의 무한성 신뢰
이 책은 사회와 문화의 구조가 인간에 대해 주인이 아니라 인간이 바로 그 구조의 주인이라는 점을 다양한 각도에서 논의하고 있다. 그래서 그의 정치학은 출발점이 ‘인공물로서 사회(society as artifact)’였다는 점을 상기시킨다. 웅거는 주체를 깨움으로써 연대를 건설하고 인간을 인간화하고 동시에 신성화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웅거는 인간성의 고양과 구조의 혁신, 인간해방과 경제적 기술적 진보, 개인의 권한강화와 민주주의 심화가 동시적으로 성취된다는 점을 강조한다.

譯者는 웅거의 급진적 실용주의나 민주적 실험주의를 ‘사회개혁의 철학적 문법’이라고 규정했다. 변혁의 일반이론으로서 웅거 사상의 가능성에 대해서는 논의가 필요하다. 특히 증세와 감세 사이의 지루한 정치적 논쟁을 넘어 사회민주주의를 혁신하고 사회를 영구적으로 창조하자는 웅거의 구상에 대해 학제간에 심도 있는 검토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다행히 웅거 연구는 일부 법철학자들로 국한되다가 최근 진보적 정치집단과 연구자들에게까지 확산된 느낌이다.


이재승 건국대법학대학원·법철학
필자는 서울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근대법사, 법철학, 사상사를 주로 공부하고 있으며, 한국의 과거사를 다룬 저작 『국가범죄』로 제5회 임종국 학술상(2011)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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