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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이야, 페북이 아니면 자살이다”
“누이야, 페북이 아니면 자살이다”
  • 교수신문
  • 승인 2012.12.10 1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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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gitamus 우리는 생각한다

지난 9월 고종석의 절필 선언은 충격적이었고 그에 대한 반응 또한 뜨거웠지만 역시나 금방 식어버렸다. 과거에도 절필 선언은 자주 있었지만 성격이 지금과는 전혀 달랐다. 작가가 붓을 내던질 때 거기에는 언제나 섬광과도 같은 아우라가 빛났다. 이제 작가의 절필은 비극이 아니라 비루함에 가깝다. 무언가가 이미 끝났고 작가는 뒤늦게 그 사실을 깨닫고 조개처럼 입을 다문다.

다른 곳에서 고종석은 글쓰기가 고귀한 그 무엇으로 여겨지던 시대는 끝났다고 말한다. 새삼 그의 절필 선언을 끄집어낸 이유는 이 시대에 절필이 지닌 작가적 실천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보려는 때문이다. 절필선언은 작가로서의 책무를 저버리는 일이라고 비판할 수 있다. 나도 그랬다. 모든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작가는 끊임없이 글을 쓰고 심지어는 그 실천을 통해 시대에 맞서서 자신의 비극을 완성해야 한다고 여겼다.

대학시절 읽었던 카뮈의 글 속 시지프스가 무거운 돌을 밀어 올리는 장면도 떠올렸으리라. 그런데 말이다. 가끔씩은 고종석의 그 절필 선언이 간지럽기도 하고 통쾌하기도 한 것은 무엇 때문일까. 백낙청 선생의 부단한 글쓰기가 통일부 말단관리 만큼도 대북정책에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생각은 물론 지나친 것이다. 작가는 등에처럼 현실을 성가시게 하고 탈나게 하는 존재이지, 어떤 정책을 실제적으로 수행하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도 가끔씩 고종석이 바로 그 느닷없는 절필선언을 통해 한 마리 등에처럼 태평하게 졸고 있던 현실이라는 말을 깨운 게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드는 것이다. 일탈과 탈구와 생성이 그의 중단에 의해 이루어진다. 생각해보면, 이 시대의 글쓰기는 아무래도 공급과잉 상태에 빠져 있다. 한때 소설가 장정일이 떠올렸던 작가로서의 책무는 이 시대에 아무래도 기이한 것으로 변해버렸다. 2년에 1편 정도 장편소설을 써내는 행위는 작가적 혼을 드러내는 일이기보다는 아마존의 자연림과 시베리아의 삼나무 숲이 모두 종이가 되는 우울한 작업이기 쉽다.

문학이 여전히 맡아야 할 책무들과 가치들을 나는 의심하지 않는다. 그러나 대형서점에 가서 쏟아지는 신간서적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우리는 현대문명이 그 모든 소중한 것들을 재빨리 쓰레기로 만들어놓고 있음을 깨닫는다. 모든 문화적 생산들은 수명주기가 너무 빨라졌다. 문학도 예외가 아니다. 게다가 문학은 더 이상 일국적 체제나 단일 언어 체제 속에 놓여 있지 않다. 오늘날의 작가들은 그저 동시대의 동료작가들이 아니라, 세계문학의 형태로 번역 출판되어 나오는 엄청난 양의 리메이드 텍스트들과 어깨를 겨루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므로 문학적 著作은 더 이상 詛嚼의 대상이 아니다. 너무도 많은 책들은 아무 책으로 변하고 그 순간에 독자들은 어떤 책에도 깊이 감응하지 않는 임포(Impotence)상태에 빠져든다.

이러한 세계에서의 이상적인 독서는 스크롤링하면서 선택적으로 훑어 읽는 것이다. 수많은 작가들이 이러한 세계 속에서 실제적인 도태의 길을 걷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학적 생산은 결코 줄어들지 않는다. 오히려 끊임없이 증가한다. 이렇게 말하면 어떨까. 이 세계는 더 이상 백지도, 침묵도 존재하지 않는 소란스러운 장소로 변해버렸다고. 전업작가라면 그는 어떤 식으로든 생계를 위해 글을 써야 하고, 사회는 작가들에게 끊임없이 부지런하게 글을 쓸 것을 독려한다. 게으름과 해찰과 방랑은 비효율이라는 이름으로 철저히 부정된다. 양계장의 닭처럼 써대지만 정작 쓰는 일의 의미도, 책읽기의 즐거움도 사라져버린다. 고종석은 거기서 갑자기 ‘아, 나 그만 둘래’ 하고 문제아처럼 선언한다.

카프카의 소설 『변신』의 진짜 주제는 사람이 벌레로 변해버린 사건이 아니라, 이 모든 사정에도 불구하고 “시계바늘은 조용히 앞을 향해 가고 있었다”는 사실에 있는 게 아닐까? 왜 그게 앞으로만 가야 하는지, 우리의 삶이 꼭 거기에 맞추어져야만 하는지 카프카는 묻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고종석은 즐겁게 골방에서의 삶을 선택한다. 우리는 꾀병을 앓는 친구를 놔두고 학교에 가는 심정이 된다. 아, 어쩌면 그 친구는 오후에 강으로 수영을 하러갈지도 모른다. 모범생이 된다는 게 시큰둥해진다. 그렇다.

고백하자면 실은 나도 쓰기 싫다는 것이다. 우리 모두 어느 정도는 그렇지 않을까? 그러나 불행하게도 절필선언도 뭔가를 제대로 해본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거다. 그런 연유로, 또 다른 이유로, 수많은 작가들이 절필선언 없이 자신만의 골방으로, 묵언수행 속으로 사라져갔다. 왕년의 작가가 페이스북에 명문을 남긴다. 수많은 친구들이 몰려와 ‘좋아요’를 누르고 댓글을 단다. 글들이 쌓이면서 그 글은 과거로 밀려나서 결국엔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허무하다. 그렇지만 다행히도 나무 한 그루 해치지 않았고 쓰레기도 남기지 않았다. 김수영을 빌려 이렇게 말하면 이 시대에 죄를 짓는 일일까? “누이야, 페북이 아니면 자살이다”라고.

손종업 서평위원/선문대·국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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