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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들의 풍경]『책 읽는 소리』(정민 지음, 마음산책 刊)·『고독한 호모 디지털』(김열규 지음, 한길사 刊
[책들의 풍경]『책 읽는 소리』(정민 지음, 마음산책 刊)·『고독한 호모 디지털』(김열규 지음, 한길사 刊
  • 교수신문
  • 승인 2002.08.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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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08-26 15:24:04
정민 한양대 교수(국문학)의 ‘책 읽는 소리’를 ‘책’이라고 부르자. 그리고 김열규 인제대 교수(국문학)의 ‘고독한 호모 디지털’은 ‘디지털’이라고 호명하자. 묘한 조화가 엿보인다.

‘책’은 ‘옛 글 속에 떠오르는 옛 사람 내면 풍경’을, ‘디지털’은 ‘사이버토피아를 꿈꾸는 인간의 자화상’을 각각 부제로 달고 있다. 둘 다 책과 디지털을 가운데 놓고 내면 풍경 또는 인간의 자화상을 곰삭이고 있으니, ‘책’이 시간과 기억의 퇴적층 위에 세운 집이라고 한다면, ‘디지털’은 이 퇴적층 위에 세워진 집이 마주치고 있는 격류의 거센 바람 소리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책’과 ‘디지털’은 서로 마주쳐서 괴이한 음향을 낸다. 그것이 만들어내는 풍경을 더듬어본다.

책: 이렇듯 옛 선비의 일과는 거의 독서로 시작하여 독서로 끝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이들에게 독서란 어떤 의미였을까. 이덕무의 말대로 책을 읽지 않고는 다른 할 일이 없어서였을까. 남극관처럼 하루라도 생각하지 않고는 살 수가 없어서였을까. 책을 읽는 일은 그들에게 끊임없이 자신을 돌아보고, 세계와의 관계를 생각하게 하는 일이었다. 느린 속도로 변화 없이 반복되는 느슨한 일상 속에서, 독서를 통해 그들은 삶의 팽뱅한 긴장을 찾았다. 물질의 삶은 조금의 변화도 없이 되풀이됐으되, 정신의 삶은 나날이 경이로움과 지적 성취감으로 충만한 변화의 연속이었다. 그 세계의 중심에는 자신이 있었고, 생활은 조화롭고 감정 또한 균형을 잃지 않았다.

디지털: 오늘의 정보 문화의 아포리아 앞에서 정보 그 자체가 직접 해답을 주거나 해답이 될 수는 없다. 하버마스가 지적한 대로 19세기 이래 후기 자본주의를 특징짓는 ‘기술의 과학화’의 진전 가운데 하나가 오늘의 정보과학이다. 그 정보는 생활 현실이 없는 추상이고 연역이다. 그리고 단편이다. 그나마 이윤과 이득의 수단으로 정보는 거의 제한되다시피 하고 있다. 본격적인 지식이나 사상이라고 부를 만한 성질의 것은 아니다. 그런데도 오늘날 우리는 정보에 심취하고 중독되고 있다. 탈출이나 구원이 그 자체로는 마련되지 않을 아포리아로서의 정보가 오늘날의 문화와 사회를 압도하고 있다는 것을 한시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책: 이덕무는 ‘옛날에는 문을 닫고 앉아 글을 읽어도 천하의 일을 알 수 있었다’고 했다. 지금도 그렇다. 굳이 밖에 나가지 않아도 인터넷에 들어가면 없는 정보가 없다. 그렇지만 우리의 삶은 왜 이렇듯 공허하고 허전한가. 이제 책은 필요할 때 꺼내 쓰고, 쓰고 나서 내던져버리는 일회용품이 되고 말았다. 주말마다 아파트 입구에는 쓸모가 다해 내다버리는 책들이 뭉텅이 뭉텅이 쌓인다. 슬픈 풍경이다.

디지털: 그렇다면 오늘날 사이버 공간 위의 정보의 홍수는 창조적 찾음에서는 또 다른 엔트로피요 노이즈라야 한다. 적어도 그런 것들을 수반하고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질 정보를 찾아내야 한다. 그것은 혼돈이고 물음이어야 한다. 이 경우 정보가치는 엔트로피의 양에 정비례한다는 초기 사이버네틱스의 이론에 새삼 귀기울일 필요가 있다. 그것은 정보가 엔트로피를 바탕에 갈고 있다는 뜻이지만, 창조적 찾음을 의도하는 지적인 모험가에게는 기성의 모든 정보는 새로운 엔트로피의 바탕이라야 한다. 또한 여기서 아날로그는 일방적으로 축출될 게 아님도 확인해야 한다.

책: 독서의 목적은 지혜를 얻는 데 있었지, 지식의 획득에 있지 않았다. 세상을 읽는 안목과 통찰력이 모두 독서에서 나왔다. 책 속의 구절 하나하나는 그대로 내 삶 속에 體化돼 나를 간섭하고 통어하고 영향력을 발휘했다. 그네들이 읽은 책이라고 해야 권수로 헤아린다면 몇 권 되지 않았다. 그 몇 권 되지 않는 책을 읽고 또 읽었다. 읽다 못해 아예 통째로 다 외웠다. 그리고 그 몇 권의 독서가 그들의 삶을 결정했다.

디지털: ‘책문화’와 ‘디지털 문화’ 사이의 뒤바뀜으로 파악되
어도 좋을 ‘인쇄문화’와 ‘후 인쇄문화’ 사이의 전환에는 크게 보아 모더니즘에서 포스트모더니즘 사이의 전환이 병행하고 있다. 그러나 세부적으로는 ‘문자’ 그 자체보다 ‘문자능력’의 변화가 수반되어 있다고 해야 한다. 그러나 오늘날 ‘새로운 문학 해독력’(new literacy) 또는 ‘후기 문자 해독력’(post literacy)은 컴퓨터에 걸려 있고, 또 디지털의 인공언어에 걸려 있다. 종이가 아닌 사이버 공간 앞에서 실현될 ‘하이퍼 리터러시’야말로 오늘의 글쓰기와 읽기에 좀더 중요하게 관여할 것이다.

책: 어느 시대나 현재는 늘 난세다. 지나고 나니까 그때가 좋았다 싶은 적은 있어도, 눈앞의 현실은 언제나 답답하고 한숨만 나온다. 독선에 빠진 임금이나 부화뇌동하는 신하들은 언제나 있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言路를 틀어막고 시녀가 될 것을 강요해도 그 앞에서 가슴을 펴고 바른 말 하는 子思 같은 신하, 외압에도 굴하지 않고 원리원칙에 입각한 공정한 법집행의 잣대를 세웠던 정위 장석지, 임금 앞에서 불의를 참지 못해 붓을 빼앗으며 史筆의 매서움을 일깨웠던 사관 채세영, 이런 정신들이 있어서 나라가 유지될 수 있었다. 지금 그들은 어디 있는가. ‘너희들 마음대로 써라. 어느 놈이 보겠느냐’는 홍윤성 식의 오기만이 판을 치는 세상이다.

디지털: 이제 가상현실은 실제 현실을 대체할 것이다. 그것은 새로운 시대의 미증유의 ‘생태환경’이다. 우리는 적어도 가상현실을 보기만 하는 게 아니고 그 속에서 현실적으로 행동하고 생활할 것이기 때문이다. 조물주가 만든 세계와 함께 인간이 만든 세계가 이제 개벽할 것이다.

책: 살아 있는 글을 쓰려면 옛 문장가의 말투를 본뜨거나, 그 글을 흉내내서는 안 된다. ‘尙同求異’의 정신만이 이러한 문제를 해결해줄 수 있다. 같아지려고 하되 다름을 추구하라는 말이다. 같은 것은 정신이고 원리이다. 그러나 거기에 담기는 것은 지금 여기를 살고 있는 나의 목소리, 나의 개성이어야 한다.

홍기돈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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