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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기투표로 우수학술지 뽑겠다? … “학술 이래도 되나?”
인기투표로 우수학술지 뽑겠다? … “학술 이래도 되나?”
  • 권형진 기자
  • 승인 2012.11.26 17:1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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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법’ 기승하는 학술지 선호도 조사

“메일이 엄청나게 온다. 학술지 문제를 인기투표 방식으로 풀어나간다는 발상이 참 웃긴 일이다.” 인문학 전공의 지방 사립대 ㄱ교수는 최근 10여개 학회로부터 메일을 받았다. 교육과학기술부에서 ‘학술지 선호도 조사’를 하고 있으니 우리 학회에서 내는 학술지를 선택해 달라는 내용의 메일이다. ㄱ교수는 “가입한 학회가 열대여섯 개쯤 되는데 10곳은 메일을 보낸 것 같다”라고 말했다.

사회과학을 전공한 서울 사립대 ㄴ교수 역시 대여섯 군데의 학회로부터 학술지 선호도 조사 참여를 권유하는 메일을 받았다. 평소 교류가 거의 없는 학회도 포함돼 있었다. ㄴ교수는 “같은 내용의 메일을 4통, 6통씩 보내온 학회도 있다. 이런 식의 선호도 조사는 결국 회원 동원 능력이 크고, 충성도 높은 학회가 유리할 수밖에 없다”라고 우려했다.

회원 수 200~300명 규모의 사회과학 분야 학회에서 편집위원장을 맡고 있는 ㄷ교수는 최근 전 회원들에게 메일을 보냈다. ‘우리 학회에서 내는 학술지가 좋은 평가를 받고 여기에 게재한 논문이 향후 연구업적으로 인정되기 위해서는 한 분 한 분의 참여가 꼭 필요하다’며 선호도 조사에 포함시켜 줄 것을 부탁하는 내용이었다.

ㄷ교수는 “솔직히 효과가 있는지는 모르겠다. 학회 입장에서는 가능한 한 사람이라도 자기 학술지 이름을 (선호 학술지에) 올리게 하기 위해 전화도 하고 메일도 보내고 대책회의도 하고 그러는 것 같다”라고 분위기를 전했다. 인문학 분야의 여러 학술지에서 편집 관련 일을 맡고 있는 ㄹ교수는 “학회를 맡은 입장에서는 부정적 악영향이 있을까 싶어 메일도 보내고 하지만 학술이 이래도 되나,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자괴감이 있다”라고 말했다.

교육과학기술부와 학술진흥정책자문위원회가 지난달 29일부터 지난 23일까지 실시한 학술지 선호도 조사는 친숙도와 활용도, 평판도, 선호도가 높은 학술지를 최대 10개씩 고르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학계가 야단법석이다. 교육과학기술부와 학술진흥정책자문위원회(위원장 왕상한 서강대)가 지난달 29일부터 지난 23일까지 실시한 ‘학술지 선호도 조사’ 때문이다. 교과부는 지난해 12월 7일 학술지 지원제도 개선방안을 발표하면서 2014년까지 학술지 등재 제도를 없애고, 학술지 평가를 학계 자율평가 체계로 전환하겠다고 밝혔다. 이번 학술지 선호도 조사는 학계의 자율적 평가를 지원하기 위해 교수·연구자들을 대상으로 실시됐다.

학술지 선호도 조사는 온라인 설문조사 방식으로 진행됐다. 한국연구재단의 한국연구업적통합정보(KRI)에 등록된 16만여 명의 교수·연구자가 대상이다. 지난 23일 현재 2만여 명이 응답했다. 질문은 크게 네 가지다. 분야별로 정기적으로 읽거나 확인하는 학술지(친숙도), 연구에 가장 큰 도움이 되는 학술지(활용도), 보편적으로 높은 인정을 받는 학술지(평판도), 우선적으로 기고하고 싶은 학술지(선호도) 등을 물었다. 문항별로 최대 10개까지 학술지 이름을 입력하는 방식이다.

우수 학술지 선정에 활용한다고? 의심 증폭

우선 요즘 유행하고 있는 오디션 프로그램처럼 학술지의 평판도와 선호도를 인기도로 조사하는 방식 자체가 학계의 냉소를 받고 있다. 앞서 언급한 ㄹ교수는 “선호도 조사라는 게 결국은 인기투표식이다. 학술지를 학자들 사이의 상품으로 본다면 뭐가 나쁘냐고 할 수도 있지만 학술의 문제를 자본논리, 경제논리로 풀어간다는 발상 자체가 달갑지 않다”라고 말했다. 이 교수는 “어느 학술지에 발표하든 논문 자체가 가치가 있으면 그 자체로 평가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등재지, 등재후보, SSCI, A&HCI 등으로 나눠 평가하는 것도 유감인데 여론몰이까지 한다는 것은 더 짜증스럽다”라고 덧붙였다.

선호도 조사가 인기투표로 흐르다 보니 벌써부터 평가의 타당성과 부작용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온다. ㄱ교수는 “세계적 학술지를 보면 아주 좁은 분야를 다루는 경우가 많다. 당연히 연구자 수도 적은 경우가 많다. 그런 분야의 학술지가 제대로 인지도를 발휘하기는 쉽지 않다. 당연히 충성도 높은 회원을 가진 학회가 유리할 것이다. 학회의 동향을 반영하는 것이 학술지이고, 연구동향에 따라 이 새로운 연구 분야를 반영하는 학술지가 나와 주는 게 학문의 오픈인데, 그럴 가능성을 막아버린다”라고 지적했다. ㄴ교수는 “이렇게 가면 새로운 생각, 새로운 분야를 다루는 학술지는 다 죽을 수 있다. 평판도가 한 방법이긴 하지만 인용지수 등도 함께 고려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대부분 교수들은 학회로부터 권유 메일을 받아도 “다 지워버린다”거나 “의미가 없다”는 반응이지만 그렇게 넘어갈 일만도 아니다. 학술지 편집위원장을 맡고 있는 ㄷ교수는 “회원 몇 명이 (선호하는 학술지에 우리 학술지 이름을) 올렸다는 얘기는 들었다”라고 전했다. 조사 결과가 왜곡될 수 있다는 것이다. 더욱이 ㄷ교수는 “애초 취지와는 달리 논문 게재가 상대적으로 쉬운 학술지를 역선택할 수도 있다”라고 우려했다.

이런저런 문제점과 부작용을 누구보다 잘 알면서도 학회가 학술지 선호도 조사에 민감한 이유는 ‘우수 학술지’ 선정과 연결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ㄱ교수도 공감한다. “학회에서 메일까지 보내고 하는 것은 결국 우수 학술지 선정에 반영이 될 거라고들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수 학술지 중심으로 집중 육성하겠다는 계획을 정당화하기 위한 것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일종의 여론 선동이다.”

ㄹ교수 역시 선호도 조사의 차후 활용에 강한 의심을 드러냈다. “학술지 등재 제도를 없애고 우수 학술지 제도를 만들면서 새 제도가 좋다는 증거를 만들기 위해 선호도 조사를 하는 것 같은데, 나중에 ‘우리는 책임이 없다’는 식으로 발 빼기할 수도 있다.”

교과부 “자율평가 참고자료일 뿐”

그러나 교육과학기술부는 학술지 선호도 조사와 우수 학술지 평가를 연결시키는 것은 ‘오해’라며 펄쩍 뛴다. 이강복 교과부 학술인문과장은 “기존의 등재제도를 대학에서 교수업적평가 등에 반영해 왔는데 앞으로는 대학, 학과가 자율적으로 결정해야 한다. 평가방법을 새로 만들 때 필요한 경우 참고하라고 제공하려는 것이다. 우수 학술지 평가 지표에 선호도 조사는 포함돼 있지도 않다”라고 말했다. 이 과장은 “선호도 조사 결과는 국내외 대학의 교수업적평가 사례를 조사한 자료와 함께 12월 중에 정책연구 보고서 형태로 대학에 배포할 계획”이라고 덧붙였다.

하지만 교과부도 우수 학술지 선정의 마지막 단계에서 선호도 조사 결과가 ‘참고자료’가 될 가능성까지 배제하지는 않는다. 이 과장은 “분야별로 어느 학술지가 우수한지 연구자들은 다 알고 있다. 최종 선정 단계에서 2~3배수 안에 든 학술지의 평판도와 선호도가 얼마나 높은지 한번 보는 정도로는 활용될 수도 있다”라고 말했다.

권형진 기자 jinny@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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