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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겁게 외교 독립 외치던 곳 … 한가한 일상의 빨래만 가득
뜨겁게 외교 독립 외치던 곳 … 한가한 일상의 빨래만 가득
  • 윤상민 기자
  • 승인 2012.11.26 14:1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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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가 된 상하이 임시정부 건물 풍경

 

▲ 큰 길에서 골목으로 들어서면, 주거지와 인접한 임시정부청사의 입구가 나온다. 20위안 정도의 입장료를 내면, 비닐 신을 준다(사진아래). 주거지역의 건물과 임시정부청사에 줄을 이어 빨랫줄로 사용하고 있다.

 

상하이 임시정부의 탄생에서 빼 놓을 수 없는 것이 3·1만세운동이다. 민중이 주체가 됐던 3·1운동 역시 당시 세계사적 흐름에서 읽어야 한다. 제정러시아의 식민지였던 국가들의 독립을 인정한 레닌의 선언, 민족의 운명은 스스로 개척할 수 있다는 미국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 선포는 조선의 독립운동에도 영향을 끼쳤던 것이다. 전 세계에 독립 의지를 알린 3·1운동이지만, 조선은 국제사회의 지원을 얻지 못했다. 미 국무부는 “윌슨 대통령의 선언은 일본제국 영토 내에는 적용되지 않는다”라고 발표했다. 열강 프랑스와 영국 역시 식민지를 포기할 마음이 없었다. 3·1운동 실패는 일제의 가혹한 탄압 때문이기도 했지만, 평화적인 시위와 독립선언문을 작성한 33인 지도부의 투항도 문제였다.

 3·1운동 뒤 독립운동을 책임 있게 전개할 지도부의 필요성이 높아지면서 설립한 것이 바로 대한민국 임시정부다. 임시정부의 위치를 두고, 만주(독립 전쟁 주장파)와 상해(외교 독립 주장파)가 맞섰지만, 상해로 결정됐고, 초대 대통령으로 이승만이 선출됐다. 임시정부는 자금 모집과 연락 업무를 위해 연통제를 실시하고, 독립신문도 펴냈다. 외교에 힘을 쏟아 미국에 구미위원부, 프랑스에 파리위원부를 두고 활동했다. 그러나 열강들은 이미 조선 지배에 동의한 상태였기에 외교 운동은 이렇다 할 성과가 없었다.

1923년 임시정부의 활동이 부진하자 국내의 독립운동가들이 상해에 모여 국민 대표 대회를 열었다. 여기에는 신채호와 독립전쟁론 세력, 안창호와 실력양성론 세력, 이승만과 외교독립론 세력이 참가해 독립운동의 통일과 방향 전환이 논의됐다. 그러나 대회는 결의안을 만들지 못한 채 결렬됐다. 독립운동의 통일이 실패하자 많은 사람들이 임시정부를 떠났다. 임시정부를 위기를 수습하려고 국제연맹에 위임 통치를 주장한 이승만을 탄핵됐다. 임시정부의 영향력은 급격이 낮아져 하나의 독립운동 단체로 취급됐다. 이후 임시정부는 1930년대 중반까지 김구를 중심으로 하는 임정고수파에 의해 명맥만 유지했다.

국민 대표 회의 결렬 뒤 모습을 김구는 이렇게 회상했다. “3·1운동 뒤 상해로 모여든 독립운동가들은 천여 명에 달했지만 몇 년 지나지 않아 몇 십 명으로 줄었다. 이 때문에 처음 문지기를 바랐던 나는 주요 직책을 역임했다. 또 처음에는 더러 방문하던 양인들도 왜놈을 대동하고 사람을 잡으러 오거나 세금 독촉하는 불란서 경찰을 빼면 찾아오는 사람이 없었다.” (『백범일지』 중에서)


21세기의 상하이 임시정부는 어떤 모습일까. 인천공항에서 2시간을 날아 도착한 상하이 푸동공항. 자동차는 번화한 와이탄 지역과 동방명주를 지나치고, 하루가 다르게 올라가는 마천루들을 지나 상하이 임시정부를 향한다. 1919년, 민족지도자들은 어떤 굳은 결의를 다지려고 곳곳에서 여기로 모여 들었을까. 주변 건물과 비슷한, 지극히 평범하다 못해 낡은 3층 건물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임을 알려 주는 건, 현판뿐이다. 상하이 임시정부 건물은 입구와 출구가 다르다. 건물 뒤쪽 허름한 골목으로 들어서면 제복을 입은 매표원이 서 있고, 늘어난 흰색 속옷을 걸치고 무표정한 얼굴의 현지인들이 그 앞을 지나다닌다.

 

 

상해는 본래 습한 지역이라, 햇빛이 좋은 날이면 빨래를 베란다, 창 밖에 널어 두는데, 임시정부 건물에 줄을 연결해 빨래를 널어 두기도 했다. 마음 한 구석이 무겁다. 역사적인 장소에 도착하니 몸이 먼저 호국 선열들의 뜨거운 피를 느끼는 것일까. 잠시 호흡을 가다듬고 들어서려는데, 문지기가 불러 세워 뭔가를 건넨다. 받아 펼쳐보니 비닐봉지다. 어디에 쓰는 물건인고 하니, 비닐 덧신이란다. 유적지가 상하면 안 된다는 의미다. 입구를 들어서면 1층에는 당시 사용했던 태극기를 비롯해 독립에 공헌한 분들의 사진이 전시돼 있다. 임시정부 시절의 이야기를 다룬 짧은 영상물도 상영되고 있다. 작은 응접실을 지나 두 줄로 오가기 힘들 정도로 좁고 삐걱대는 나무 계단을 올라가면 백범 김구 선생의 집무실이 나온다.

 3층에도 문서와 사진이 전시돼 있다. 생각보다 작은 규모, 짧은 체류시간. 눅눅한 공기에, 어두운 임시정부 내부와, 어색하게 앉아있는 마네킹들을 보면, 관람료가 아쉬운 것은 둘째 치고, 유적지는커녕 방치 수준으로 빨래 걸이로 사용되고 있는 임시정부청사에 안쓰러운 마음이 든다. 그 소유와 관리도 중국인이 한다니 한결 더 마음이 무거워진다. 점점 빠르게 현대식 건물이 들어서는 주변을 보면, 임시정부청사 건물의 미래도 밝아 보이지 않는다. 망명정부 시절에 모였던 수많은 독립 운동가들을 잊고 사는, 오늘날 우리네 모습에 대한 무의식적인 부채감 때문일까. 오늘도 상하이 임시정부를 찾는 발걸음은 끊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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