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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정 지원을 골고루 하는 게 과연 학계 발전에 도움 되는가?”
“재정 지원을 골고루 하는 게 과연 학계 발전에 도움 되는가?”
  • 교수신문
  • 승인 2012.11.19 1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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쟁점_ 학술지 지원사업과 학문발전

교육과학기술부와 한국연구재단의 학술지 관리 및 육성 정책에 대해 말들이 많다. 한쪽에서는 등재학술지의 양적 증가를 학술지의 난립이라고 비판하는가하면 다른 한쪽에서는 학문의 균형발전이라고 환영한다. 한국연구재단(구 한국학술진흥재단)은 1998년 이래로 학술지 등재제도를 도입하고 매년 천여 개의 등재학술지 발행단체에 경비를 보조하고 있다.

 이 제도는 도입 이후 연구자들의 신규임용, 승진, 정년보장 및 국가 연구비 지원 사업 등에 활용되면서 대학 사회에 큰 영향을 끼쳤다. 또한 그간 주먹구구식으로 이뤄져왔던 학술지의 형식 및 체계를 표준화함으로써 학술활동의 양적 팽창에 커다란 기여를 했다. 하지만 이런 긍정적인 효과는 학술지 등재제도가 갖는 온갖 부정적인 효과에 비하면 사소하다.

학술적 권위를 상실한 학술지
우선 학술지 등재 요건이 형식적 부분에만 치중해 있을 뿐만 아니라 이 형식적 요건이라는 것도 학술지 발행기관이 약간의 서류상 수고로움만 감수하면 쉽게 충족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이었다. 그러다 보니 2000년대 이후 대학들이 교수 연구실적을 강화하는 흐름 속에서 학술지 등재제도는 학술지들이 우후죽순 생겨나는 결과를 초래했다. 1998년 이후 지금까지 등재학술지 수가 거의 36배 증가했다. 문제는 이들 중 많은 학술지들이 등재학술지에 요구되는 형식적 요건을 충족하는 데 급급해 수준 미달의 논문들을 무차별적으로 게재하는 등 파행적으로 운영되고 있다는 것이다. 훌륭한 학술지란 무릇 투고 논문에 대한 엄격한 동료심사를 통해 그것이 갖는 학문적 타당성을 철저하게 검증하는 절차를 가지고 있고, 이런 까다로운 절차를 통과한 논문만 학술지를 통해 발표될 수 있다.

바로 이런 이유에서 학술지는 해당 학문공동체에 의해 빈틈없이 검증된 지식의 보고로 간주되는 것이다. 하지만, 부실 학술지의 급격한 증가는 국내 학술지의 연구성과 검증 절차에 대한 신뢰도를 추락시켰고, 더 나아가 학술지의 권위와 학술성 마저 추락시켰다. 불행히도 학문적 권위를 상실한 학술지는 껍데기만 학술지이지 학술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다. 그런 부실 학술지에 대해선 학문공동체의 공유된 지식의 기록으로서 학술지의 역할을 이야기하는 것조차도 이미 사치다. 실제로 부실 학술지들의 난립은 국내 학술지 전반의 질적 수준을 의심하게 만들었고 그로 인해 학술지에 발표되는 연구결과물들은 연구자들 사이의 상호교류를 촉진하고 후속연구를 창출하는 데 별다른 역할을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런 폐단에 대한 반성에서 교과부는 2011년 12월 학술지 평가를 기존의 학술지 등재 체제에서 학계 자율 평가 체제로 전환하고 다수의 학술지에 소액으로 지원하는 현 제도를 없애며 그 대신 일부 엄선된 학술지들을 국제적 수준의 학술지로 육성하는 것을 목표로 파격적 지원을 한다는 방안을 발표했다.

하지만 이 방안은 곧 일부 학계의 조직적 반발에 직면했는데 가령, 한국역사학회, 한국인문학총연합회, 그리고 교수노조 등의 교수단체들은 학술활동의 본성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 교과부의 새로운 학술지 정책을 원점에서 재검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필자는 이런 주장에 공감할 수가 없다. 위 단체들이 특히 문제 삼는 것은 현행 소액다수의 지원방식을 개편해 소수의 우수 학술지에 지원을 집중하는 교과부의 방안이다. 그 단체들은 이 방안이 ‘학회와 학술지를 재편, 서열화하고’ 또한 ‘막대한 재원을 극소수의 학술지에만 집중시키고 절대 다수의 학술지들은 외면’할 것이라고 비판한다.

나아가 이는 ‘학술지의 양극화’를 낳고, 기초학문이나 인문학 등이 소외되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고 우려한다. 하지만 필자는 묻고 싶다. 학술지의 난립 속에서 부실 학술지들이 양질의 투고 논문 부족에도 불구하고 등재학술지 형식적 조건을 채우기 위해 온갖 편법을 동원하는 현재의 행태를 그대로 유지하자는 말인가. 재원을 소수의 우수 학술지에 집중하는 것이 왜 나쁜가. 모든 학술지에 대해 정부가 재정적인 지원을 골고루 하는 것이 과연 국내 학계의 발전에 도움이 되는가. 좀 더 구체적으로, 엄격한 동료심사를 통해 투고 논문의 학문적 타당성을 정확하게 판단할 능력도 의지도 없는 부실 학술지들을 정부 지원이라는 산소호흡기로 연명하게 만드는 것이 과연 해당 학문의 발전에 얼마나 도움이 되는가.

한국연구재단이 HK사업이나 보호학문육성사업과 같은 다양한 연구지원프로그램을 통해 기초학문이나 인문학을 지원하고 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때문에 앞서 언급한 단체들이 우수 학술지 사업에 반대하면서 요구하고 있는 것은 단순히 기초학문 혹은 인문학을 보호하고 육성하라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 요구하는 것은 기초학문 혹은 인문학 분야의 국내 학술지들에 대한 소액다수의 현행 지원방식을 유지하고, 그래서 (그들의 표현을 빌면) ‘학술지의 서열화 혹은 양극화’를 막자는 것으로 봐야 한다. 그러나 소액다수의 현행 지원방식이 과연 기초학문 혹은 인문학의 발전에 기여하는가는 생각해 볼 일이다.

학문의 성숙도와 연구자의 이해관계
사실 충분한 규모의 연구자 집단이 형성되지 않거나 혹은 아직 학문적으로 충분히 성숙하지 않은 연구 분야에 굳이 학술지가 필요한지도 의문이다. 학술지의 순기능이 개별 연구자의 학문적 성취를 검증하고, 그를 통해 학적 지식을 기록함으로써 후속연구에 대한 가이드 역할을 하며, 이에 더해 개별학자의 연구력을 평가하는 유용한 지표를 제공해 주는 것이라고 한다면, 이러한 순기능은 모두 해당 학문 분야가 충분히 성숙해 학문적인 엄격함과 신뢰성을 갖춘 학술지를 만들어낸다는 가정 위에서만 성립하는 것이다. 만약 그런 가정이 만족되지 않는 상황에서 소액다수의 정부 보조에 의해서 무차별적으로 학술지가 발행된다면 순기능은커녕 무수한 역기능만을 초래할 것이다.

이러한 역기능은 학술지 등재를 위해 편법을 동원하다가 제재를 받은 몇몇 로스쿨 학술지들의 사례가 잘 보여준다. 이 학술지들은 검증된 학적 지식의 보고도 아니고 후속 연구를 위한 가이드도 아니다. 단지 승진이나 재임용과 같은 연구자들의 이해관계에 복속하기 위해서 활자화되는 미숙성된 사견들의 기록일 뿐이다. 이를 왜 정부가 세금을 들여서 지원해야 한단 말인가. 결과적으로 해당 학계의 학문적 성숙도와 무관하게 정부가 단순히 기초학문 혹은 인문학이라는 이유만으로 학술지 발행 경비를 지원하는 것은 연구자들의 개인적 이해관계에는 부합할지 몰라도 그 학문 분야의 발전과는 전혀 상관없다. 그것이 학계에 끼치는 해악을 고려해 보면 재원 낭비의 문제는 오히려 사소하다.

물론, 정부 지원이 끊기면 많은 학술지가 문을 닫을 것이다. 이렇게 되면 학자들 사이의 학술적인 소통과 교류의 장이 줄어들 것이라고 우려할 수 있다. 정당한 우려이다. 하지만 굳이 학술지가 아니더라도 이런 우려는 쉽게 해소할 수 있다. 최근 해외 학계에서 저변을 넓혀가고 있는 미출간 논문 인터넷 아카이브를 생각해 보자. 코넬대의 arXiv.org은 자연과학 및 사회과학 일부 분야의 논문들을 동료심사 없이 모두 데이터베이스화해서 학자들이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게 하고 있다.

이런 아카이브는 장시간의 동료심사를 생략할 뿐만 아니라 큰 발행경비가 들지 않는다는 점에서 연구자들 사이의 소통과 교류를 촉진하는 측면에서 기존 학술지보다 더 잘 기능할 것이다. 결론적으로 교과부의 우수 학술지 사업에 대해 제기된 최근 몇 가지 비판들은 기존 학술지 관리 및 육성 정책이 보여줬던 폐해에 대한 충분한 성찰을 결여한 것으로 아무리 좋게 봐주더라도 기존 정책을 유지할 어떤 합리적 근거도 내놓지 못하고 있다. 물론 필자도 우수 학술지 사업의 모든 내용을 긍정적으로 보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무턱대고 비판할 일도 아니다.


최성호 경희대·철학
필자는 서울대에서 박사를 했다. 영국 캠브리지대, 캐나다 퀸즈대에서 교육 및 연구를 했고, <Mind>, <Stanford Encyclopedia> 등의 학술지에 다수의 논문을 게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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