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24 23:00 (수)
루터와 성채교회 정문
루터와 성채교회 정문
  • 이덕주 감리교신학대·역사신학
  • 승인 2012.11.12 13:5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學而思

지난달 31일은 루터의 종교개혁이 일어난 지 495주년 되는 날이었다. 이번 학기 교회사 수업을 듣는 학생들과 함께‘루터의 종교개혁 495주년을 맞은 감리교신학대 95개 논제’를 발표하고 이를 학교 게시판에 붙였다. 내가 이런 퍼포먼스를 하게 된 동기는 지난해에 독일 비텐베르크를 여행하고나서 얻은 영감 때문이다.

종교개혁의 도시 비텐베르크의 첫 인상은 도보로 두세 시간이면 둘러 볼 수 있는‘작고 아름다운 중세도시’풍광이었다. 비텐베르크 여행의 첫 관심은 루터가 95개조 논제를 붙였다는 성채교회 정문이었다. 워낙 유명한 문이라 교회사 책 화보를 통해 본 적이 있었는데“루터가 95개조 논제를교회 정문에 망치로 두드려 박음으로 종교개혁의 시작을 알렸다”고 배우고 가르쳤던 내용에 대한 재검토가 필요했다. 쇠문이었기 때문이다. 직접 보니 펜스를 쳐 출입을 통제한 채 전면에 빽빽하게 95개조를 부조 형태로 새겨 넣은‘철문’이었다. 루터 때 문은 종교전쟁 때 파괴됐고 지금 문은 전쟁 후 새로 만든 것이라 옛 모습은 아니다.

비텐베르크에서 문득 든 의문

고딕성당의 전형적인 모습을 한 교회로 들어서니 측면에는 루터의 전신 부조가 부착돼 있었고, 회중석과 성소를 구분하는 중간 지점에 있는 설교대 바로 아래 바닥에는 사과상자만한 루터의 무덤이 있었다. 주일마다 강론하던 그 자리에 조성된 작고 소박한 무덤을 보면서‘죽음을 담보한 설교’를 생각했고, 루터의 강론을 들었던 교인들과 신학생들이 앉았던 자리에 앉아‘한국교회의 종교개혁’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다.

명상과 기도를 한 후 교회 밖으로 나오는데, 관광객 한 명이 뒤쪽 벽면에 붙인 무엇인가를 보고 있었다. 가서 보니 루터의 95개조 논제 복제품이었는데 그 위치는 밖에서봤던 교회 정문 바로 안쪽이었다. 쇠로 돼 있던 바깥과 달리 안쪽은 나무로 돼 있어루터 때처럼 그곳에 종이를 붙여 놓고 관광객들에게 95개조 복제품을 팔고 있었다.

그때부터 나의 고민은 시작됐다. “루터가 95개조 논제를 문 안쪽에 붙였을까? 바깥쪽에 붙였을까?”루터에 관한 어느 저술도 이 부분에 대해서 명쾌한 답을 주지 못했다. 상식적으로‘문 밖에’붙였을 것이란 생각이 지배적이었고 나도 그렇게 생각했는데 정문의 실체를 보고나니‘문 안’부착도 무시할 수없는 가능성으로 제기됐다.

바깥쪽에 붙이는 것과 안쪽에 붙이는 것은 큰 차이가 있다. 게시 의도와 독자가 다르기 때문이다. 당시 비텐베르크 성채교회는 대학 채플 역할도 하고 있었다. 그래서 성채교회 정문은 대학 교수들이 학생들에게 과제물이나 세미나 토론 주제, 자기 입장을 알리는 게시판 역할을 했다. 교회 문은 교수와 학생, 사제와 교인, 교회와 사회의 ‘소통 공간’이었다.

개혁은 나부터 소통방식 바꾸는 것

바로 그런 곳에 루터는 당시 유행하고 있던 면죄부 판매에 대한 질의와 비판을 담은 95개조 논제를 (수업 언어인) 라틴어로 적어 부착했다. 루터는‘바깥사람들’이 아니라 자기 강의를 듣는 신학생들에게 자기 고민과 생각을 알리며 토론을 제안했던 것인데, 그것을 학생들이 베껴서 독일어로 번역한 후 주변 사람들에게 돌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걸 읽은 독일 시민들은“맞다. 교회는 이렇게 바뀌어야 한다”며 지지를 표했고 인쇄업자들은 그것을 대량 인쇄해 독일 전역에 뿌렸다. 이로써 종교개혁은 거역할 수 없는 시대 흐름이 됐다.

여행을 마치고 온 후 2학기 수업은 종교개혁사로 시작됐다. 80여명 학생들에게‘나의 95개조’를 만들라고 했다. 개인 95개조를 조별로 묶어 정리하고 그것을 종합해 전체 수강생의 95개조를 만들었다. 한국교회에 대한 실망과 분노, 고민과 열정을 담은 ‘2012년 감신 95개조’는 그렇게 탄생했다.

그것을 대자보로 만들어 학생들과 함께 학교 정문 옆 게시판에 붙였다. 그 과정에서 학생들은 남과 소통하는 법을 배웠다고 했다. 나 자신도 많이 배우고 깨달았다. 학생들은 내게 새로운 차원의 소통을 요구했다. “신학교수는 모든 면에서 신학생들의 본이 돼야 한다. 말이나 글이 아닌, 행동과 실천으로 신학함의 본을 보이는 교수가참 스승일 것이다.”

결국 개혁은 시끄러운 곳이 아니라 조용한 곳에서, 밖이 아니라 안에서, 남이 아니라 나로부터 소통의 방식을 바꾸는 것으로 시작된다는 평범한 진리를 재확인한 수업이었다.


이덕주 감리교신학대·역사신학
필자는 감리교신학대에서 박사를 했다. 현재 도서관장, 한반도평화통일신학연구소장,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장을맡고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