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3-29 17:05 (금)
원로칼럼_ 경제민주화라는 선거공약의 모순
원로칼럼_ 경제민주화라는 선거공약의 모순
  • 박영호 한신대 명예교수·정치경제학
  • 승인 2012.11.12 10:0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박영호 한신대 명예교수·정치경제학
2012년 내내 12월에 있을 대통령 선거 때문에 온갖 구호와 공약이 난무하고 있다. 그것들 중에서 가장 혼란스럽고 이해할 수 없는 것은‘경제민주화’다. 심지어 정치인들 스스로의 입에서도 그게 무슨 개념인지 잘 모르겠다는 푸념이 나온다. 그도 그럴 것이, 경제민주화란 말을 단어의 뜻 그대로 이해한다면, 우리가 속해 있는 신자유주의 체제와 경제민주화는 모순적인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복지사회 건설이란 공약까지도 그렇다.

지금까지 줄곧 與野할 것 없이 우리가 살길은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밖에 없다고 강변하면서 비정규직을 양산하고, 기업 구조조정을 통한 정리해고를 잔인무도하게 자행하며 反경제민주화에 앞장섰던 사람들이 대통령 선거철이 되니까 교활하고 영악하게 경제민주화를 대통령 선거 공약으로 내걸고 있다. 기가 막히는 일이다.

신자유주의는 세계적 규모의 경제전쟁을 통해서 경제민주화를 패배시킨 장본인이다. 최근 <이코노미스트> 보도에 의하면 전 세계 인구의 3분의 2 이상이 1980년대 이래 소득 격차가 더 벌어진 나라에 살고 있다. 미국의 경우 최상위 0.01%가 전체 국부에서 차지하는 소득 비중이 1980년 1%에 불과하던 것이 지금은 5%에 이른다고 한다. 지난 4월 한국조세연구원이 발표한 바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경우 소득 상위 1%가 전체 소득의 16.6%를 차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미국(17.7%) 다음으로 빈부격차가 심하다.

1998년 외환위기 이후 우리나라는 노사정 합의에 의한 새로운 경제민주화를 시도해 보려고 했으나 실현시키지 못했다. 바로 신자유주의적 세계화 때문이었다. 그들은 당시 거세게 활개치던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에 무릎을 꿇었다. 그것이 얼마나 비인간적이고 비윤리적인 자본의 논리인지, 경제민주화의 싹을 짓밟는 짓인지를 숨기고 온갖 거짓말들을 해댔다. 그랬던 그들이 이제 와서는 갑자기 경제민주화를 하겠단다. 신자유주의의 폐해로 다수 국민의 삶이 피폐해진 상황에서 표를 구걸하려니 그런 표변이 나온 것인데 그렇다면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압력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묘안이라도 갖고 있단 말인가. 아니, 정말 그런 의도라도 절실하게 갖고 있는가.

오늘 한국사회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다 불안하다. 젊은이들은 취업이 안되고 직장인들은 언제 해고될지 모르고 자영업자들은 언제 문닫을지 몰라 전전긍긍이다. 나이든 사람들은 노후가 불안하다. 그러다보니 인간관계도 각박해졌다. 삶이 불안하고 나부터 살고보자는 비열한 경쟁논리가 판을 치니 여기저기서 절망한 사람들의 묻지마 범죄가 터진다. OECD 최고의 자살율은 한국인들이 처한 삶의 현황을 가장 극적으로 대변해주는 통계다.

경제민주화라는 것은 기업에게 일자리 더 만들라고 독려하거나, 국민에게 복지혜택을 조금 더 주는 차원의 개념이 아니다. 이는 자본의 이익과 대립하고 있는 거대한 체제투쟁이다. 한마디로 경제민주화는 탈자본주의적 민주주의 성향을 강하게 내포하고 있다. 그동안 자본주의 역사에서 보면 사회가 자본의 이익에 반하는 경제민주화를 요구하게 되면 곧 바로 민주주의를 포기해 버렸다. 나치정권의 역사적 경험이 바로 그것이다. 그들은 바이마르공화국의 민주주의가 자본의 이익에 위협이 되자 민주주의를 버리고 전체주의 사회로 전환했다. 뿐만 아니라 2차 세계대전과 같은 전쟁도 불사했다. 자본주의가 필요로 하는 민주주의는 자본의 이윤창출에 도움이 되는 한도 내에서였다는 사실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된다.

신자유주의적 세계화가 진행되면서 경제적 민주주의는 말할 것도 없고 개별국가들의 정치적 민주주의까지도 고사하고 있다. 현 상황 하에서는 보수진영은 말할 것도 없고 진보진영이 정권을 잡아도 경제민주화와 복지사회 건설은 불가능하다. 김대중 정권, 노무현 정권은 지금까지 한국 역사에서 가장 진보적인 정권으로 경제민주화와 복지사회 건설 의지가 강했던 정권이었다. 그러나 그들 역시 자본의 이익에 반하는 정책을 쓸 수 없다는 한계를 알고 경제민주화도 복지사회 건설도 포기해 버렸다.

이명박 정권은 보수정권답게 철저하게 자본의 이익을 대변하고 있다. 원래 보수정권은 자본의 이익을 대변하는 정권이다. 그런데 어떻게 보수정당인 새누리당이 자본의 이익에 반하는 경제민주화를 하겠단 공약을 내놓을 수 있단 말인가. 차라리 삶은 밤에서 싹이 나기를 바라는 게 낫다.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체제 하에서는 우리가 바라는 경제민주화는 불가능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대선후보들의 달콤한 공약을 철저히 캐물어야 할 것이다.

박영호 한신대 명예교수·정치경제학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