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複數名의 장소에서 듣기의 윤리를 배우다
複數名의 장소에서 듣기의 윤리를 배우다
  • 교수신문
  • 승인 2012.10.30 1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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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 한국을 만든 40곳] 현장스케치_ 시민 품으로 돌아온 부산근대역사관의 오늘

 

▲ 김경연 부산대 교수가 2012년 10월 어느날 찾아가본 부산근대역사관의 육중한 정문.아치모형의 이 정문이 만약 생물체라면, 그는 도대체 얼마나 많은 역사의 생채기를 지켜봐왔을까. 사진= 김경연 부산대 교수
일요일 구도심의 한낮 속에 그곳은 덤덤히, 무료하게 서 있었다. 역사의 징한 굴곡을 온몸으로 돌파해온 장소라기보다 그저 나날의 삶이 시작되고 다시 파하는 일상의 집처럼 범상하게 보였다. 파란만장한 생을 다 치르고 겨우 안식을 허락받은 자의 비감한 단단함 같은 것이 전해오기도 했다. 부산광역시 중구 대청로 104 부산근대역사관. 매끄럽고 평평해진 그 이름이 적잖이 낯설었다. 내게 익숙한 그곳의 이름은 여전히 ‘미문화원’. 시내 영어학원에 다니던 중학생 언니가 가끔 들러 미국영화 보고 미국사람 만나고 왔다며 신나게 자랑하던 곳. 그럴 때면 열다섯 언니의 얼굴에는 어김없이 아메리칸 드림으로 충만한 미소가 번졌고, 나도 덩달아 달뜨곤 했다.

 

부산에 있으나 부산에 속하지 않았고, 한국의 남루가 범접하지 못하는 아름다운 外邦. 초콜릿을 나눠주듯 신대륙에 대한 달콤한 선망을 고루 나눠주던 그곳은, 한국 속의 美國이었다. 2012년 10월, 부산근대역사관으로 명패를 바꾼 익숙하고도 낯선 그곳에 나는 다시 도착했다. 열다섯 언니와 열두 살 내가 아메리칸 드림에 들뜨지 않을 만큼 시간이 지나 찾은 그곳은 이제 더 이상 미국은 아니었다.

대신 그곳은 미국이고 또한 일본으로 살아야 했던 지난 역사를 부단히 현재로 불러오는, 그래서 부끄러움을 감각하고 심문하고 성찰하는 엄중한 기억의 장소가 됐다. 과거와 현재가 교차하는 그 곳에서, 나는 식민의 역사란 어쩌면 改名의 역사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1929년 동양척식주식회사 부산지점으로 건립되면서 ‘동척빌딩’으로 불리던 곳은 해방 후인 1949년부터 미국해외공보처 ‘미문화원(아메리칸 센터)’으로 호명되다, 1999년 부산시로 반환된 뒤 ‘부산근대역사관’이라는 오늘의 이름을 얻었다. 서재필/필립 제이슨(Philip Jaisohn), 이광수/가야마 미쓰로(香山光郞), 혹은 친일파, 친소파, 친미파로 정체성을 수시로 갈아타며 삶을 도모하던 소설 「꺼삐딴 리」의 이인국처럼, 동척빌딩이며 미문화원이었고 부산근대역사관이 된 이 특이한 장소의 複數名이야말로 식민지의 현실을 가장 핍진하고 적나라하게 웅변해 주는 것은 아닐까.

식민의 역사란 다름 아닌 하나의 이름이 또 다른 이름으로 유인되거나 점령되는 과정이며, 피식민자란 자신의 이름을 생존이나 안위와 맞바꾸는 임계적 선택에 부단히 내몰리거나 미혹되는 자들일 지도 모른다. 이 강요된 혹은 유인된 改名을 고스란히 체현한 장소가 이제 부산근대역사관이라는 단 하나의 이름으로 남아 지난 시간의 비참과 오욕을 증언하고 있다.

지난 시간의 비참과 오욕 증언
김수영의 선언처럼 이 땅에 더 깊숙이 뿌리박기 위해서라면, ‘역사는 아무리 더러운 역사라도 좋’고, ‘진창은 아무리 더러운 진창이라도 좋’(「거대한 뿌리」)은 것이 아닌가. 더러운 역사조차 망각의 구멍 속으로 밀어 넣지 않고, 아니 더러운 역사이므로 더 강렬히 기억하며, 결코 삭제될 수 없는 진창 같은 과거의 부름에 응답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헤집어 상처 난 과거를 치유하는 방법인지도 모른다. 부산근대역사관은 부산의 근대사 100년을 조명할 수 있는 200여 점의 유물과 각종 영상물, 모형물을 두 개의 전시실에 배치해 놓고 있다. 제1전시실은 부산의 근대개항, 일제의 수탈, 근대도시 부산을 주제로 일제의 침략과 수탈로 형성된 부산의 근대사를 집중 조명한다. 일본과 지리적으로 가까웠던 만큼 부산에는 일본인들의 전관거류지가 대규모로 일찌감치 조성됐고, 부산근대역사관이 있는 대청동 일대 역시 17세기 이래 초량왜관에 속하던, 타자들의 거처였다. 그 때문인지 흥미롭게도 1940년에 발간된 잡지 <모던일본>의 조선판에는 부산을 내지, 곧 일본에서 가장 가까운 조선의 도시로, “초밥도 튀김도 본고장 맛을 내 위화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으며, “내지인에게는 추억의 도시”라 표현하고 있다. 식민을 拓植, 곧 개척이라 강박적으로 개명해 불렀던 그들에게 조선은 식민지가 아니라 단지 문명화의 시혜를 베풀어야 할 ‘외지’였으며, 개척된 식민도시 부산은 차라리 낭만적 향수의 대상으로 둔갑했던 셈이다.

제2전시실은 동양척식주식회사, 근현대한미관계를 주제로 구성됐다. 일제의 국책회사인 동척의 농장경영과 일본인 이주정책을 통한 경제수탈 과정이 소개되고, 한미관계 역시 19세기 출발부터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과 반환운동까지를 상세히 다루고 있다. 1982년 미문화원 방화사건에 대해서는 “반미의 무풍지대로 인식되었던 남한에서 일어났다는 점에서 미국은 물론 국민을 충격 속에 몰아넣었다”는 설명과 함께 이후 부산지역 시민단체들의 미군기지 반환운동을 소개하고 있어, 이 사건이 미군기지나 미문화원 반환운동의 간접적 계기가 됐음을 시사한다.

고신대 신학생들의 사건 이후로 미문화원은 내게도 더 이상 흠도 티도 없는 동경과 선망의 외방은 아니었다. 감히 속내를 온전히 들여다 볼 수 없어 소문과 이야기만 더욱 무성했던 그 비현실적 공간은 그날 이후 맨얼굴이 드러나는 적나라한 현실의 장소가 됐다. 늘 서너 명의 사복경찰들이 오가며 지나던 내국인들을 감시하던 곳. 동경이 모멸과 분노로 바뀌면서, 어린 시절 언니와 나의 아메리칸 드림도 그렇게 종지부를 찍었다.

정신대 할머니들의 육성 증언 담은 동영상
부산근대역사관에서 가장 잊히지 않은 것은 동척의 만행이나 왜곡된 한미관계가 아닌, 실은 정신대 할머니들의 육성 증언을 담은 8분짜리 동영상이다. 정신대에 끌려간 조선인 성노예 여성의 절반 이상이 부산·경남 출신이었다고 한다. 여든이 훨씬 넘어 열일곱 시절에 당한 유린의 기억을 토로하는 할머니들의 증언이야말로 이 기념관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말해주는 전언이 아닐까. 죽은 과거를 보존하는 납골묘가 아니라, 잊히고 찢긴 자들의 중얼거림 같은, 절규 같은, 혹은 선언 같은 낮은 목소리를 온힘을 다해 듣는 장소가 되는 것, 다시 김수영의 말을 빌리자면 ‘빠찡꼬를 하듯이’, ‘슈사인 보이가 구두닦이 일을 하듯이’(「들어라 양키들아」) 그렇게 평범하고 일상적으로 그 목소리의 발화자들을 매순간 치열하게 기억하는 장소가 되는 것이다.

 

김경연 부산대·국어국문학과
필자는 부산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비평론을 전공하고 있으며 평론집으로 『세이렌들의 귀환』이 있다. <오늘의 문예비평> 편집주간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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