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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드 맨살의 바위산 절경… ‘고려행궁’의 꿈을 품었구나
누드 맨살의 바위산 절경… ‘고려행궁’의 꿈을 품었구나
  • 변남주 목포대 도서문화연구원 연구교수
  • 승인 2012.10.25 1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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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이야기 (20) ‘고려해상왕국’ 선유도

 

선유도의 가운데 섬에 있는 망주봉. 1123년 남송의 서긍이 기록한 고려 숭산행궁, 자복사, 군산정, 오룡묘, 관아 등의 터는 선유도 망주봉의 남쪽에서 발견된 고려기와와 청자 등으로 알 수 있다. 사진=변남주
신선이 머물렀다는 선유도 주변에는 섬이 많다. 동쪽에 무녀도, 무릉도, 신시도 그리고 서쪽에 장자도, 대장도, 관리도 등이 있다. 순서대로 한글로 풀이하면 춤추는 여자, 무릉도원, 산신령이 됐다는 단군의 도읍지 신시, 부자의 고칭 장자, 장군, 벼슬아치가 된다. 이 모두는 교묘히 仙遊의 이미지와 어울린다. 이런 섬들의 모임새는 열중쉬어, 차려, 일렬종대 列島가 아니라 옹기종기 무리지은 뭇도(群島 떼섬)가 옳다.

 

이른바 고군산군도다. 크고 작은 60여 섬들로 구성되고, 누드 맨살이 드러난 바위산들의 경치는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이런 뭇도 중 으뜸은 선유도인데, 새만금방조제 중앙부의 서쪽과 접한다. 이미 제방과 연결된 신시도와 무녀도, 선유도 간을 연륙하는 다리 완공은 2014년 목표다.

그런데 건설예산 약 3천억 원은 무인도인 죽도를 폭격기 사격장으로 제공한 결과다. 선유도 등은 연륙 후 새만금 신도시 건설과 아울러 국제해양관광지단지로 계획하고 추진 중인데, 미국 서부 사막에 건설된 카지노 도시 라스베가스가 개발모델이다.

눈여겨보니 선유도는 원래 세 개의 섬이었다. 남쪽 섬에는 조선 후기 고군산수군진 자리에  진마을, 가운데 섬에는 망주봉 주변에 새터마을, 북쪽 섬에는 남악마을이 있다. 그러나 세 섬은 간조육계도이며, S라인 선유도해수욕장으로 모두 연결돼 있었다.

이 중 시선을 끄는 것은 가운데 작은 섬에 있는 望主峰이다. 가히 압권이다. 소뿔모양의 괴이한 모양새에다가 전설과 역사성도 깊다. 망주봉은 ‘유배 온 신하가 서울에 있는 임금을 바라본다’는 뜻이나 신선들이 바둑을 두었다는 전설에 기인해 별칭은 ‘선유봉’이다. 깎아지른 바위산으로 그 높이가 무려 110m에 이른다. 하나도 아니고 두 개가 마주한다. 거대한 것이 불끈 솟아올랐다는 표현이 적절하다. 발칙한 상상이지만, 뙤약볕 해변의 S여인과는 아무 상관없고, 망주봉에서 바라보는 남쪽 선유도의 특이 지형에 답이 있다. 스카이라인이 머리카락을 드리우고 하늘보고 드러누운 영락없는 여자다. 그런데 망주봉 모양새는 진안군 마이산과 쌍둥이 같이 닮았다. 무슨 사연이 있는지 궁금하다.

이런 고군산의 중심 선유도, 역사 속에 비친 모습은 어떠할까. 선유도는 중세시기 서해연안해로에서 핵심포구였다. 조운선의 중간 기착지, 왜구 소탕의 전진기지, 외국 사신단과 상단 등이 머무른 곳이다. 사신단은 중국, 일본은 물론이고 동남아 자바국까지 확인된다. 인근 십이동파도, 야미도, 비안도 바다에서 인양된 청자보물선으로도 설명된다.

지명 변천을 살펴보자. 1123년 남송의 서긍이 쓴『고려도경』,『고려사』,『조선왕조실록』등에서 군산, 군산도, 고군산으로 확인된다. 무신집권기 최고 권력자 최우를 제거하려했던 김희제(?∼1227) 장군은 군산도에서 태어나 상선을 타고 개성으로 진출했다. 정지 장군은 군산에서 왜적을 무찔렀다. 그런데 조선 세종 무렵, 群山수군진이 지금의 군산시인 진포로 옮기면서 ‘군산’ 지명까지 넘어간다. 조선 초기에는 수군진의 병선이 이동하면 육지 지명도 함께 이동했었다.

예컨대, 목포(시)가 나주목포(택촌 마을)에서, 해남 송지 어란이 화산 어란에서, 여수 돌산이 고돌산에서, 강진 마도진도 완도 고마도에서 옮겨갔다. 군산은 지명을 지금 군산시에 빼앗기고 한 동안 ‘군산도’로 불리었다.『세종실록지리지』(1454)에서 처음 확인되며 하한은 1622년까지다. 그러다가 1627년 이후부터 조선 말기까지는 ‘고군산’으로만 불리어졌다. 이는 고군산에 별도로 수군진이 설치된 기간과 거의 일치한다. 일제강점기 들어 군산(시)과 확실히 구분하기 위해 고군산은 ‘선유도’로 개명돼 오늘에 이른다.

그렇다면 고려시대 군산은 뭇섬 중 어느 섬을 말하는 것일까. 서긍은『고려도경』에 정확히 적었다. 1123년 6월 6일 오전 8시 무렵, 남송 휘종의 사신단 일행은 고려 群山島에 정박했는데, 다음과 같이 주변을 설명했다. “산은 열두 봉우리가 잇닿아 둥그렇게 둘려 있는 것이 마치 성과 같다”고 했다. 지금 선유도 남동쪽 너른 앞바다와 일치한다.

당시 군산도의 생생한 기록을 좀 더 살펴보자. “고려선 여섯 척이 마중을 나왔는데, 무장한 병사를 싣고, 징을 울리고, 호각을 불며 호위했다. 따로 작은 배에 초록색 도포 차림의 관리가 타고 있는데 홀을 바로잡고 배 안에서 읍을 했으나, 통성명은 하지 않고 물러갔다. 나중에 접반 김부식 등이 마중 나왔다. 배가 섬으로 들어가자 연안에서 깃발을 잡고 늘어서 있는 자가 백여 인이나 됐다. 접반(김부식)이 群山亭으로 올라와 만나주기를 청했다. 그 정자는 바다와 가깝고 뒤는 두 봉우리가 있는데, 그 두 봉우리는 나란히 우뚝 절벽을 이루고 수백 길이나 치솟아 있다. 문 밖에는 관아 10여 칸이 있고, 서쪽 가까운 작은 산 위에는 五龍廟와 資福寺가 있다. 또 서쪽에 崧山行宮이 있고, 사방에 주민 10여 채가 있다”고 했다.

여기에 등장하는 김부식(1075∼1151)은 『삼국사기』저자로 유명한 사람인데, 서긍은 “풍만한 얼굴과 거대한 체구에 얼굴이 검고 눈이 튀어 나왔다”고 별도로 적었다. 여기에 언급한 내용으로 보아 군산도는 선유도 중에서도 망주봉, 오룡묘가 있는 가운데 섬이 분명하다.

 

큰 망주봉 아래에서 발견된 절표시 기와와 향완 등으로 보아 자복사로 추정된다.
필자는 이를 염두에 두면서 수 일 전 망주봉 남쪽 일대를 지표조사 했다. 결과는 놀라웠다. 도처에 널브러진 고려시대의 기왓장과 청자, 토기편 외에도 고려 초기 갈색병, 중국산 추정 검은자기를 확인했다. 하지만 조선시대 분청이나 백자는 거의 발견되지 않았다. 특별히 절 표시(卍)가 된 기왓장과 향을 피운 청자그릇으로 자복사를, 대문을 받치는 문초석과 기와 청자 등으로 관아를, 양쪽 바다에 인접한 곳을 군산정으로 비정할 수 있었다. 더 나아가 서쪽에는 임금의 임시궁궐인 숭산행궁이 있었을 것이다.

 

또『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 “왕릉 같은 큰 묘가 있고, 금은보화가 많이 부장되어 있다”고 했는데, 실지로 선유도에는 다섯 곳에 고분이 있다. 고려정부는 유사시를 대비하여 ‘선유도해상왕국’을 두었던 것으로 보인다.

일례로 1270년 6월, 삼별초는 천여 척으로 선단을 구성하고 강화도에서 남하했다. 그런데 진도에 도착하기 전 70 여 일간의 행적이 밝혀지지 않았는데, 삼별초의 당시 거처는 군산도일 가능성이 커 보인다. 서해연안해로에서 꼭 거쳐야하는 중간 요충지이면서, 강화 남쪽 섬에서 천 척을 수용할 수 있는 넓은 포구를 가진 곳은 선유도가 유일하기 때문이다.

『왕조실록』에서는 수백 척의 배를 정박할 수 있다고 했는데, 여름철용 북쪽 포구까지 더하면 천 척은 거뜬하다. 동쪽 포구는 사계절용으로 팔방의 바람을 피할 수 있다. 그런데 아직까지 ‘고려해상왕국’의 공식적인 학술조사는 이루어진 바 없다. 게다가 새만금과 연계시켜 세계적인 해양관광단지로 키우겠다는 계획에도 보이지 않는다. 결론으로 차별화된 선유도 고유의 해상왕국문화를 외면하고 라스베가스형 카지노왕국을 꿈꾸고 있으니 답답할 뿐이다.

변남주 목포대 도서문화연구원 연구교수

변남주 목포대 도서문화연구원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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