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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능력 넓혀주는 예술이 있어야 할 자리
인간의 능력 넓혀주는 예술이 있어야 할 자리
  • 교수신문
  • 승인 2012.10.04 1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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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은 치유가 아니다

치유담론이 유행하고 있다. 베스트셀러 자리도 ‘위로’ 권하는 책들이 점령했다. 방송도 앞다퉈 ‘힐링’을 주제로 한 프로그램들을 편성하고 있다. 오는 11월 부산에서 개최될 제2차 세계인문학포럼의 주제도 ‘치유의 인문학’이다. 인문학을 치유의 관점에서 소급해내는 것도 나름 의미는 있다. 그러나 전국이 ‘힐링’ 바람에 휩싸이는 건 적절치 않다. 부산에서 나오는 <오늘의문예비평> 86호가 이렇게 유행하고 있는 치유담론의 허와 실을 짚어낸 바 있다. 고통의 실체를 밝히는 작업에 무게를 실은 박시성 고신대 의대 교수와, 오길영 충남대 교수(영문학)가 곱씹어볼만한 문제의식을 던졌다.

 

▲ 구스타프 클림트, 「Medicine(composition draft)」, 72x55cm, Oil on canvas, Private collection, Vienna, 1897/98.

 

인간에겐 모두 마음의 상처가 있다. 그 상처는 ‘트라우마’ 또는 ‘外傷’이라고 흔히 불린다. ‘치유’ 또는 ‘힐링’이라고 쉽게 불리는 방법들은 이 상처로부터의 회복을 주장한다. 도대체 상처란 무엇인가. 치유란 무엇이며 어떻게 얻을 수 있으며 진정한 치유는 과연 가능한가. 우리는 그 본질과 원인, 그리고 인간이 상처와 치유에 어떻게 얽혀 있는지 기제에 대해 숙고해야 한다.

너무 가벼운 트라우마, 너무 쉬운 치유
인간은 매우 쉽게 마음의 상처를 얻는다. 유행하는 치유 방법들은 과연 상처로부터 벗어나게 해줄 수 있을까. 정신분석적 관점에서 말하자면, 그렇지 않다. 트라우마는 출생으로부터 시작돼 이후 겪는 상실로부터 콤플렉스를 구성해 평생을 지배한다. 자크 라깡은 이 콤플렉스에서 경험하는 존재적 결여의 문제를 중요하게 다룬다. 반복되는 상처들은 트라우마에 의해 의미 붙여진 것들이기에, 치유나 힐링의 이름으로 일시에, 쉽게, 온전히 해결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너무 쉬운 치유를 꿈꾼다. 여러 방법들이 미혹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트라우마의 중핵에 자리 잡은 주체의 책임을 회피하고 싶은 탓일 수도 있다. 치유를 말하는 방법들 중 몇몇은 문학과 영화 같은 예술로부터 얻은 영감에 근거한다. 여기서 주장하는 효과는 감정과 인식의 ‘변화’다. 정신분석의 관점에서 볼 때 이 변화에는 고려해야 할 문제점이 있다. 첫째, 이 방법들은 암시와 동일시에 의존해 지배 가치에서 명명한 관습적인 건강성 또는 긍정성으로의 변화를 지향한다. 그러나 정신분석에서 궁극적인 건강성이란 없다.

긍정성이라는 가치 지향 또한 타자가 견고하게 세워놓은 질서에 편입할 방법을 찾는 것과 같다. 둘째, 이 방법들은 마음 상처의 기원이 되는 근본적인 트라우마에는 다가서지 못한다. 지시적인 개입을 통해 증상을 경감하거나 현실세계에 대한 적응적 변화를 지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신분석 임상은 사회적인 영향에 대한 표준을 세워주는 과정이 아니다. 정신분석의 목표는 자기발견을 통한 주체화인데, 자신의 삶에 대해 더 이상 타자를 탓하지 않고, 자기 욕망에 대한 책임을 감당하게 하려는 과정이다.

카타르시스, 쾌락, 소통 그리고 증상
이렇듯 문학과 영화를 이용한 방법은 가치중립적일 수 없다는 과제와 증상 경감과 적응이라는 표면적인 목적만을 의도한다는 점에서 인간의 근본적인 트라우마를 해결할 수 없으며, 제대로 된 치유나 힐링이 될 수도 없다. 예술이 마치 치유처럼 오인되는 작용들이 있다. 첫째는 카타르시스다. 사람들은 카타르시스를 통해 부정적 감정을 제거하고 치유를 얻을 것이라고 기대한다. 그러나 카타르시스는 유익한 감정을 방출하기도 한다. 훌륭한 예술작품을 통해 대면하는 인간의 어두운 진실 앞에서 배출되는 정서는 일상적인 부정적 감정과는 다른 카타르시스다.

이는 부정적 감정을 제거하는 치유와 상관이 없으며, 긍정성이라는 표준에만 순응하도록 고안돼 있지도 않다. 둘째, 예술은 쾌락이다. 현대인들은 영화, 드라마, 콘서트, 프로스포츠, 사이버게임 같은 대중예술의 오락과 재미에서 쾌락을 얻는다. 그러나 오락과 재미는 대중 예술 자체가 아니라 쾌락하는 주체로부터 온다. 쾌락에는 주체의 욕망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반면 대중예술을 치유 수단으로 보는 방법들은 주체와 욕망의 관계를 간과한다. 셋째, 예술은 소통으로 이해되기도 한다. 음악과 회화에서 재현된 소리와 이미지들은 마치 언어처럼 일정한 문법을 통해서 표현되고 전달된다. 이런 소통 기능은 타인과 진정하게 소통한다고 여기게 하는 효과를 가져다준다. 그러나 정신분석적으로 볼 때 소통이란 근본적으로는 미끄러지는 시니피앙의 효과에 기대어 있는, 자아와 타아간의 오해에 기반한 것이어서, 상호간의 온전한 이해란 없다.

더욱이 예술을 통한 소통은, 현실 지각과는 꽤 간격이 있는, 상호주관적인 경험이다. 정신분석은 예술작품을 꿈이나 행동처럼 인간 무의식에 의해 형성된 상상적인 생산물로 본다. 우선은 무의식과 연관된 증상의 발현인 셈이다. 증상은 언어처럼 구성돼 있는 시니피앙이어서 특정한 의미로 환원되지 않는다. 예술작품은 예술가로부터 만들어진 다양한 의미작용을 지닌 시니피앙의 연쇄들이다. 거기서 치유와 힐링을 찾으려 한다면, 증상 외에 무엇을 발견할 수 있을까.

美와 숭고
무엇보다 예술이란 아름다운 것이란 무엇인가를 묻는 작업이다. 예술의 감상에서 얻는 보상은 '아름다움을 관조하는 기쁨'인데, 이때 아름다운 것으로부터 얻는 기쁨은 그 대상에게 고착된다. 라깡은 이런 미적인 대상을 物의 개념으로 발전시켰다. 물은 가장 근본적인 욕망의 원인으로서, 어떤 시니피앙으로도 표상될 수 없는 空이며, 단지 승화를 통해서만 표상될 수 있는 대상이다. 이때 대상은 인간 욕망의 근본적인 원인이며, 승화의 과정을 통해서 본질이 변화된 숭고한 대상이 돼 인간에게 표상된다. 미적인 것은 숭고한 성질을 지니고 있으며, 승화된 예술작품을 대할 때 만나는 것은 이 숭고한 대상이다.

욕망의 원인, 결코 가질 수 없는 그 대상과 조우하는 것이다. 예술은 미와 숭고를 통해 인간으로 하여금 존재와 욕망에 대해 깨닫게 하고, 욕망의 대상을 만나게 함으로써, 주체를 살아있도록 만든다. 숭고한 대상은 현실 인식을 변환시키기도 한다. 슬라보예 지젝에 따르면, 숭고한 대상은 현실의 찡그림으로, 현실에 부여된 의미를 변화시켜 그 실체에 의문을 갖게 한다.

혐오와 아름다움의 모호한 경계 속에서 발견되는 대상들은 물의 숭고한 지위에 놓인다. 숭고한 대상의 그런 찡그림으로 인해 주위의 현실이 가진 고정된 의미를 무의미화 할 수 있게 된다. 치유라는 환영을 통해서 현실에 동화하도록 만드는 대신 현실에 의문을 품으며 이화하도록 요구한다. 이것이 예술작품의 숭고함이다.

인간 오성을 위하여
예술은 인간의 인식과 경험의 지평을 확장해 준다. 치유나 힐링 같은 지배적인 이름으로 의도적인 변화를 유도하는 일은 예술의 본질과는 거리가 멀다. 예술을 다른 목적을 위한 도구 수준으로 격하시키는 것은 인간의 소중한 자산을 허비하는 일이다. 예술은 치유가 아니다.

오히려 치유라는 허상이 현실의 찡그림을 덮어서 지식을 은폐하거나 진실을 탐구할 기회를 박탈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예술은 깨달을 수 있는 인간의 능력을 넓혀준다. 예술이 승화를 통해 숭고한 대상을 만나도록 할 때, 인간은 깨닫는다. 그런 오성을 위해 예술을 고유한 지위에 있게 하자. 그것만으로도 예술의 가치는 충분하다.


박시성 고신대 의과대학
필자는 부산대에서 박사를 했다. 저서로 『정신분석의 은밀한 시선: 라깡의 카우치에서 영화읽기』, 논문으로 「라깡의 담론과 현대의학」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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