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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가 만들었지만 민중들 정치공간으로 활용
황제가 만들었지만 민중들 정치공간으로 활용
  • 교수신문
  • 승인 2012.09.10 1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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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 한국을 만든 40곳]<8> - 탑골공원

 

 

2001년 11월 23일 새벽 2시경, 인적이 드문 탑골공원 삼일문 앞에 나타난 세 사람은 낫을 묶은 긴 장대로 ‘삼일문’이라 쓰여진 현판을 뜯어내어 몇 조각으로 부숴버렸다. 한 달전 경찰의 방해로 성공하지 못했던 현판 내리기 작전이 성공한 것이다. 이들은 날이 밝자 자청하여 기자회견을 열고, 반일 민중운동의 정신이 배어있는 탑골공원에서 친일 장교였던 박정희 전대통령이 쓴 현판을 떼어내는 것은 당연하다고 주장했다. 90년이 지난 역사적 현장을 둘러싼 장소 쟁탈전은 현재도 계속되고 있다.

탑골공원은 탑동공원, 파고다공원으로도 불렸다. 조선시대에는 원각사가 있었으며, 대표적인 상업공간으로 사람들의 왕래가 많은 雲從街 동쪽 끝자락에 위치했다. 고종은 대한제국을 선포하면서 圓丘壇과 팔각 皇穹宇를 만들어 자신이 천자임을 세상에 알렸다. 1896년 영국인 브라운이 건의한 황실음악연주소를 설립하면서 구상한 탑골공원에도 1902년에는 팔각정을 세웠다. 팔각은 하늘과 땅을 잇는 도형으로 황제를 상징한다.고종은 탑골공원을 매개로 황제의 존재감을 드러내고 싶었다.

▲ 민족적 함성이 거세되고 공원으로 변한 탑골공원(파고다공원)의 1930년대 모습. 원각사지10층석탑이 완전한 모습을 갖추지 못한 채 방치돼 있다. 그 왼쪽 옆으로 서구적 공연장이 보인다. 조선명소엽서로 나온 탑골공원 모습이다.
일제, 민중 목소리 덮으려 놀이공원으로 만들어

일제, 민중 목소리 덮으려 놀이공원으로 만들어

 

하지만 탑골공원에 모여든 민중들은 고종에게 민중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기를 요구했다. 미국으로 망명했다 돌아온 서재필을 중심으로 조직된 독립협회는 탑골공원에서 서울 시민을 모아놓고 대한제국의 친러정책을 비판하는 만민공동회를 열었다.

만민공동회는 그동안 지배자들에게 숨죽여 왔던 민중들이 자기 권리를 찾는 기회이기도 했다. 고종은 만민공동회가 제안한 헌의6조를 받아들이면서 새로운 국가 건설의 가능성을 보였지만 탄압으로 귀결됐다. 탑골공원은 황제가 만들었지만 민중들이 자신들의 정치공간으로 활용했다. 을사보호조약 이후 일제의 영향력이 강해지면서 탑골공원은 서울 민중들의 손에서 멀어지고, 통감부 관료들과 일본인들이 즐기는 연회장이나, 서울을 방문한 외지인의 관광지로 활용됐다. 황제의 권위를 상징하고, 시민들이 민중의 공간으로 만들려던 탑골공원을 일본인들은 놀이 공간으로 만들었다.

강제 倂呑 이후 총독부는 탑골공원을 휴식공간으로 조성했다. 정자와 벤치를 마련하고, 라일락과 정향꽃을 심은 화단과 수련이 떠 있는 연못을 만들고, 벚꽃과 백양목, 포플라를 심어 제법 공원다운 조경으로 관람객의 눈을 사로잡았다. 휴식 공간의 묘미를 살리기 위해 찻집도 운영하고, 음악당을 만들어 매주 연주회를 열었다. 심지어 요정까지 허가해 공원은 요정의 앞마당이 됐다.

일요일만 출입 가능했던 공원은 1913년부터 매일 개방됐고, 몇 년 뒤에는 야간에도 개장하기까지 했다. 신문에는 정자에 앉아 담배를 피우는 노인네들의 한가로움, 공원의 봄 풍경과 시민들이 산보하는 모습을 실어 조선 민중이 총독부가 제공하는 시혜를 누리고 있는 것처럼 선전했다. 탑골공원에서 외치던 민중의 목소리는 총독부의 造景 사업에 묻혀 버린 것이다. 총독부의 무단정치와 언론 사상의 통제는 한말 번성했던 독립운동의 주체적 역량에 커다란 타격을 줬다.

민족대표는 조선독립운동의 노선을 고종의 승하와 국제적인 상황 변화를 고려해 국제기구와 일본정부를 상대로 한 독립 청원운동으로 정했다. 많은 지방 사람들이 서울로 모여드는 고종 인산일 직전인 3월 1일을 독립선언일로 잡았다. 그런데 계획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학생들이 참여하고, 예상외의 많은 민중들이 서울로 모여들었다. 민족대표는 순수한 독립선언이 변질될 수 있다고 판단하고 거사 하루전날 만세운동 장소를 탑골공원에서 주변의 인사동 泰和館으로 변경했다.

3월 1일 오후 2시 탑골공원을 가득 메운 수천명의 민중은 민족대표들을 기다리고 있었지만, 민족대표들은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축배를 들며 조선 총독에게 전화를 걸어 자수했다. 어른이 없는 탑골공원에서 정재용을 비롯한 학생들은 팔각정에 올라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독립선언을 ‘가장 영광 있는 우리의 권리’라고 외쳤다. 학생들의 외침과 함께 민중들의 독립만세가 울려 퍼졌다. 탑골공원을 출발한 민중들은 고종이 안치돼 있는 덕수궁을 향했다. 조선 민중의 哭소리는 전국으로 확산됐다. 시작은 민족대표가 책임졌으나, 마무리는 조선의 민중의 몫이었다.

해방 후에는 독재권력과 자리다툼

조선 민중들의 저항에 당혹한 일제는 두 번 다시 탑골공원에서 기미년의 기억이 되살아나길 원하지 않았다. 탑골공원은 조선 민중에게 만세운동을 허용한 혐의로 폐쇄됐다. 공원 이용은 1년이 지나서야 가능했다. 그렇지만 뒷문은 10년간이나 폐쇄됐다.

공원을 드나드는 사람들에 대한 감시도 더 심해졌다. 하지만 민족언론은 조심스럽게 그날의 기억을 되새겼다. 매년 탑골공원의 봄 풍경 사진을 게재했다. 해마다 사진의 앵글은 달라도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팔각정은 반드시 포함됐다. 조선 민중들에게 팔각정은 담배나 피우면서 쉬는 휴식의 공간이 아니라 권리를 찾아 외치던 곳이었기 때문이었다.

친일신문들은 아예 탑골공원을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총독부는 매주 연주회를 개최하고, 요리집을 만들어 놀이공간으로 만들었다. 심지어 친일파 한상룡은 통감부시절 재정고문이었던 메가타 다네타로(目賀田種太郞)의 동상을 세워, 이곳을 일본 제국주의 선전 공간으로 만드는 데 앞장섰다. 뒷날에는 이승만이 한상룡을 따라 자신의 동상을 세웠다가 망신을 당했다.

그러나 총독부는 탑골공원을 조선 민중의 저항 못자리라는 기억을 지울 수 없었다. 1924년 조선청년총동맹이 임시대회를 개최하자, 겁먹은 총독부는 탑골공원을 폐쇄했다. 1926년 6월 10일 순종의 인산일에는 일본 군대를 주둔시켜 조선 민중의 탑골공원 출입을 차단하기까지 했다. 탑골공원은 지배자들이 만들었지만 자신의 권리를 찾으려는 민중들의 저항 공간이었다. 식민지 시대에는 일제와, 해방 후에는 독재정권과 치열한 자리다툼을 벌였다. 탑골공원에는 5·16군사쿠데타 이후 세워진 3·1독립선언기념탑과 손병희 동상이 3·1운동의 흔적으로 남아있다. 민중에게서 신뢰받기를 원했던 군사정권이 독립선언 당시 공원에 나타나지도 않았던 손병희를 앞세워 3·1운동의 과실을 나눠가지려 했던 산물이다.

차철욱 부산대 한국민족문화연구소 조교수·한국현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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