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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히 다가가고자 하는’ 시대의 시뮬라크르
‘영원히 다가가고자 하는’ 시대의 시뮬라크르
  • 교수신문
  • 승인 2012.09.10 1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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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gitamus 우리는 생각한다

18세기 독일의 미술사가 였던 빙켈만은 그리이스 조각과 건축을 ‘고귀한 단순, 위대한 고요 (edle Einfalt, stille Groesse)’라고 묘사했다. 단어 네개 만으로 그렇게 적확하게 고전적 건축과 조각을 포착해내는 그의 안목은 놀라울 따름이다. 이 말은 고전미술에만 국한되지는 않을 듯하다. 문학, 음악, 철학 등에서 이른바 클래식이라고 불리는 대부분의 장르의 작품들에는 단순성 고귀함과 고요함의 위대가 있다. 근래에 대학들에서 고전읽기가 폭넓게 도입돼, 많은 학생들로부터 뜨거운 반응을 얻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니, 새삼 고전이 무엇이었지 하는 뜬금없는 의문과 함께 빙켈만의 오래된 경구가 떠오른다. 현대의 바쁜 일상을 보내다보면 양장본 고전들은 책꽂이만 장식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읽히지 않는 고전은 실내 인테리어 장식 역할을 할 따름이지만, 새삼 펼쳐들기에도 고전들은 무겁게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지 않아도 머릿속이 복잡한데, 저 무겁고 두꺼운 고전들을 펼쳐서 어찌 감당하겠는가 하는 생각에 아예 고전보다는 신문과 잡지를 비롯한 가벼운 읽을거리들을 먼저 찾게 되는 것이 상례다. 특히 스마트폰 시대에 고전의 운명은 예측을 불허한다. ‘고전이 무엇이었는지’ 하는 당연하면서도 쉽지 않은 질문에 답을 구하는 일이 새삼 절박해지는 이유도 여기 있을 것이다.

빙켈만의 말대로 우선 고전은 단순하다. 어떻게 그렇게 단순한 통찰을 가질 수 있었는지 고전을 숭상하던 시대에 많은 이론가들도 여러 가지 방향에서 숙고했었지만, 난마처럼 얽힌 삶의 양상이 고전 속에서 갑자기 단순해지는 것이 사실이다. 수많은 현대의 雜 사건들의 갈래들이 가지를 뻗기 시작한 최초의 단순성을 고전들은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그 단순함은 어떤 해갈을 선사한다. 그리고 그 안에 자리 잡은 거부할 수 없는 진리의 무거움은 바위 같은 묵직함으로 존재의 가벼움을 일깨운다.

우리 시대를 포착하고자 하는 현대의 이론들이 고전으로 새삼 회귀하고 그것을 참조하는 것은 현학도 사치도 아니다. 두 번째로 고전은 고요하다. 단순한 진리는 스스로를 화려하게 치장할 필요가 없다. 그리고 사람들을 피로하게 만들면서 괴롭혀야할 이유도 없다. 그냥 있는 그대로의 고요함과 그 고요 속에 잠재된 위대함이 숭고한 전율을 느끼게 한다. 고전적 문학작품 안에는 회피할 수 없는 운명과 결코 분리될 수 없는 자연이 있다. 처음 고전의 그러한 고요를 접하면 심심하고 재미없다.

그러나 그 고요를 곱씹다보면 번다한 현대의 수다들을 한 순간에 침묵하게 하는 어떤 준엄함에 전율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한 고전들은 (근)현대인에게 경쟁의식을 촉발시키기도 했다. 오래된 고대-현대인 논쟁에서 고대인을 거인에 비유하고 현대인을 거인의 어깨위에 올라앉은 난장이에 비유한 것은 고대인들보다 더 높고 멀리 볼 수 있는 현대의 우위를 설파하는 (근)현대 역사철학적 의식의 단초가 되기도 했다. 현대인들은 고대인들을 이기고자 했고, 고전에 도전하고자 했으며, 고전의 무게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사소한 일화이지만 오디세우스의 개가 20년 이상 살았다는 호머의 비과학적 전제를 문제 삼으며 현대의 우위를 주장했던 일은 근대 과학의 좀스러운 자존심을 드러낸다. 그러나 이는 고전을 두고 근대의 자기의식을 확보하고자 하는 힘겨운 고민들의 한 단면이기도 하다. 고전은 그런 면에서 보면 (근)현대인을 따라다니는 유령 같은 존재이기도 했다. 實在로 확증될 수 없는 것이면서 끊임없이 규범적인 힘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고전들을 재창출하는 번역 그리고 비평은 일종의 유령 만들기이기도 하다.

원본이 사라진 자리에서 그 흔적들로 직조되는 유령적 고전의 존재는 규범의 힘으로 현대 지식인을 압박하고, 도전을 촉발해 현대의 새로운 고전을 정립하게 한다. 그럴 것이 고전은 하나의 창조적 전형이자 모델이기 때문이다. 인문교양이 오랫동안 고전교육을 근간으로 해온 것도 우연이 아니다. 현대의 고전적 저자라 할 헤겔도 마르크스도, 니체도 프로이트도, 심지어 데리다 까지도 사실 알고 보면 고전의 아이들이다. 고전은 이와 같이 끊임없이 재창출되는 ‘어떤’ 것이다.

마치 ‘기원이 궁극과 같다’는 헤겔의 언명처럼 고전은 과거이자 미래이며, 기원이자 목적이다. 고전들은 그런 한 점에서 ‘영원히 돌아갈 수 없는’ 혹은 ‘영원히 다가가고자 하는’ 시대의 시뮬라크르인 것이다. 이러한 고전의 위상은 전자책 시대에 또 한 차례 크게 변화할 것이다. 이제 막 책장 넘기는 것을 모방하고는 기고만장한 스마트폰을 굳이 따돌릴 필요도 없겠지만, 우리시대에도 고전은 거인의 걸음처럼 언제나 앞서 있다. 이미 있었던 것으로서 그리고 앞으로 올 것으로서.

 

이창남 서평위원/한양대·비교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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