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팡이에다 고등어를 양 손에 쥔 삼대독자 아들을 등에 업은 아비는 하나뿐인 오른팔로 아들의 다리를 꼭 안고 외나무 다리를 건넌다. 이 광경 앞에서 소용돌이 근대사의 바람도 잠시 숨을 멈추었을 것이다.
한국 현대사의 비극적 시련과 초극 의지는 작가에게만 투사된 것은 아니었다. 1997년 12월 50년 만에 평화적 정권 교체가 이뤄졌고 감동은 가실 줄 몰랐다. 그리고 다시 5년이 흘렀다.
‘현대사의 비극적 시련’을 육체적 불구에도 불구하고 외나무다리 건너기로 상징했던, 또는 그렇게 읽어내려 했던 시대는 가고, 12월 대선을 앞둔 지금, 나라 안은 뒤숭숭한 추문에 휩싸여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추문은 피로와 권태, 냉소와 무관심을 가져온다. 추문의 진원지가 넓고 깊을수록 사실 여부를 떠나 추문 자체가 만들어내는 그림자가 유령처럼 사람들을 가위눌리게 만든다. 그것은 사람들의 깊은 곳에 존재하는 순수한 열정, 꿈, 성숙을 향한 노력을 앗아가게 마련이다.
그렇다면, 평화적 정권교체를 지지한 나라 안팎의 염원을 훔쳐간 것은 누구인가. 사사건건 발목을 잡고 늘어졌다는 정치적 반대파들인가. 도대체 누가 50년만의 수평적 정권교체, 그 속에 깃든 지역, 학력, 성, 직업, 종교 등 모든 차별을 넘어서 더욱 성숙한 민주주의를 열망했던 그 열정을 앗아갔는가. 못난 아비들이다.
김대중 정권에 대한 평가는 역사의 몫이다. 그러나 대통령의 아들들에 대한 평가는 현실의 법이 맡아야 할 것이다. ‘등잔 밑이 어둡다’고 했던가. ‘홍업’씨의 수뢰 비리를 지켜보면서, ‘아비’ 역할이 무엇인가를 되묻는다.
그러나 불행한 것은 김대통령 만이 그런 아비가 아니라는 데 있다. 차기 대권의 유력한 후보주자인 이회창씨 역시 ‘못난 아비’임에 틀림없다. 수난 이대의 아비는 자식이 죽어 돌아올 줄 안 세상의 아비였지만, 그에게는 떠나보내고 애타도록 기다릴 아들이 없었다. 못난 아비들이 아닐 수 없다.
국무총리 서리로 임명된 장상 총장을 두고 세간의 말들이 험하다. 역시 아들 문제다. 미국 국적을 소지해서다. 당사자는 발빠르게 해명을 냈지만, 한국 사회의 ‘주류’가 이토록 자식 문제에 있어서 도덕적 불감증을 보이고 있다는 사실은 놀라울 뿐이다. 사회 지도층 특히 정치와 권력의 주변을 맴도는 ‘아비’들일수록 도덕적 원칙에 충실해야 한다.
수난이대의 아비 ‘박만도’와 그의 아들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들은 먼저 자신을 꾸짖고, 먼저 자신을 죽였던 익명의 집단명사들이다. 그들은 지금,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가고 있는지도 모르는 이 새로운 ‘수난이대’를 어디선가 안타깝게 지켜보고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