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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 근대성을 묻다
역사에 근대성을 묻다
  • 이영석 서평위원/광주대·서양사
  • 승인 2012.07.05 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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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gitamus 우리는 생각한다

의학사가로 널리 알려진 로이 포터가 생을 마감한지 10년이 흘렀다. 연구열이 가장 왕성하던 50대 중반의 나이에 갑자기 은퇴하더니 곧바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케임브리지대학 크라이스츠 칼리지에 입학한 후 존 플럼과 스키너 밑에서 18세기 사회사를 공부했다. 주로 의학 및 과학사 분야의 뛰어난 저술과 논문을 남겼고, 1990년대 이후에는 런던의 사회사나 또는 18세기 계몽운동에 관한 저술로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 포터는 오랫동안 웰컴의학사연구소에서 연구에 전념하면서 다방면에 걸친 왕성한 저술활동으로 명성을 얻었다. 그러면서도 특유의 기행과 기벽 때문에 독서대중의 찬사와 함께, 학계에서는 냉소와 질시의 눈총을 받기도 했다. 사실 나는 의학사와 관련된 그의 초기저술은 거의 읽지 못했다.

그러다가 『런던의 사회사』를 읽고, 마지막 저술이라고 할 수 있는 『계몽운동: 브리튼과 근대세계의 창조』에 깊이 빠져들었다. 포터가 18세기 영국에서 관심을 두는 것은 계몽운동과 세속화의 관계다. 즉 지식인들의 가치관과 세계관이 일반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그것이 구체적으로 일상적인 삶에 어떤 변화를 가져다주었는지를 탐색한다. 넓게 말하면 근대적 주체 또는 근대성의 기원을 추적한다. 포터는 우선 18세기의 주목할 만한 사회분위기의 하나로 종교적 감수성의 변화를 지적한다.

17세기까지만 하더라도 이성과 신앙은 하나이며 함께 있어야 한다는 주장이 강했다. 국교회 중심의 전통에서 종파적인 균열 또한 용납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18세기에 종교와 신앙은 이성을 통해 분석해야 할 대상이 되었다. 이러한 객관화 또는 객체화야말로 종교적 관용과 다원주의로 나가는 길을 닦았다. 이와 함께 로크를 비롯한 지식인들은 성서의 권위에 직접 도전하지는 않았지만, 이성에 입각해 성서를 해석하려고 했다. 이 또한 성경의 모든 말이 성령의 계시에서 비롯된다는 프로테스탄트 성서주의에 대한 회의론으로 연결됐다. 다음으로 포터가 강조하는 것은 감성적 개인주의로 불리는 새로운 태도다.

명예혁명 이후 개인의 자유, 법의 지배, 종교적 관용 등의 새로운 질서가 정착됐다. 여기에서 개인의 자유로운 삶이 중요한 아젠다로 등장한다. 완고한 전통과 연장자의 권위, 가부장적 가족의 규제, 귀족의 지배 등으로부터 개인의 해방을 추구하는 경향이 시대 조류로 점차 뚜렷하게 나타났다. 그리고 이런 풍조를 선도한 집단은 지식인 외에 아무래도 해외무역과 상업 분야에 진출해 부를 축적하고 새로운 세계에 눈을 뜬 상인들이었다. 마지막으로, 포터는 감성적 개인주의가 소비 및 쾌락의 정당화와 연결되는 지적 계보를 보여준다. 이러한 정당화를 통해 세속적 행복이 바로 '지고의 선'이라는 등식이 널리 퍼져나갔다.

이제 '죽음의 무도(danse macabre)'나 '죽음을 기억하라(memento mori)' 같은 교회의 교시는 구속력을 잃었다. 세련된 스타일과 멋 또한 삶에서 긴요한 요소로 자리잡았다. 사람들은 소비와 쾌락을 통해 행복에 이를 수 있다고 믿었다. 영국의 시장경제는 개인주의와 소비주의에 힘입어 더욱 더 탄력을 받게 됐다. 런던뿐 아니라 지방 소도시들의 재흥과 번영, 교통 및 서비스산업의 발전, 정보 및 레저의 산업화와 더불어 이전보다 한층 더 증가한 소비자들이 전통적으로 엘리트에게만 허용됐던 여흥에 참여했다.

“행복이란 살아 있는 인간에게 오직 유일하게 가치가 있는 것이다. 부도 권력도 지혜도, 지식과 강함도, 아름다움과 덕과 종교와 심지어 삶 그 자체도 행복을 낳는 데 기여하지 않는다면 전혀 중요하지 않다.” 근대 영국 사회에 대한 포터의 해석은 너무 한쪽만을 강조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는다. 이 저술에 깃들어 있는 뿌리깊은 잉글랜드 중심주의, 특히 영국이 근대문명을 만들어나갔다는 신념은 실제로 상당수 영국 역사가들이 공유하는 편견이기도 하다. 더욱이 18세기를 번영의 시대로 일반화하고 상류사회에 나타난 행복 추구의 경향이 사회 전체에 걸쳐 파급되었다는 견해는 너무 낙관론에 치우지지 않았나 싶다. 18세기 번영의 배후에는 오히려 전쟁과 그 후유증으로 고통을 겪는 사람들이 넘쳐났다.

그렇더라도 한 세기의 추세와 변화를 과감하게 일반화하면서 자신이 본대로, 느낀대로 세밀하게 그림을 그리는 그의 장인적 태도에 깊은 감명을 받는다. 어차피 역사는 역사서술을 통해 새롭게 재현된다. 장인적 정신과 태도에 덧붙여 번득이는 상상력을 가졌다면, 역사가에게 그보다 더한 행복은 없을 것이라고 되묻곤 한다.

이영석 서평위원/광주대·서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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