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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연구자다’라고 외치지 못하는 이유
‘나는 연구자다’라고 외치지 못하는 이유
  • 신현승 고려대 HK연구교수·동양철학
  • 승인 2012.07.02 18:1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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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후속세대의 시선

신현승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 HK연구교수·동양철학
끊임없이 배우고 물음을 제기한다는 의미에서의 學問. 지금의 나에게 이 배움과 물음의 공간(학문 공간) 속으로 언제부터 발을 들여놓기 시작했냐고 물으면, 대답은 그냥 한줌의 웃음으로 대신할 뿐이다. 아니 시작의 기억과는 무관할 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것이 숙명이고, 운명이라고 할 수밖에. 그래서 시작이 언제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지금 2012년 여름, 불혹이 넘은 나이에도 난 배우고 있고 끊임없이 물음을 제기하지만, 아직도 미로를 헤매는 중이다. 그것은 퇴로 없는 막다른 골목에 서 있는 굶주린 어린 양의 형상일지도 모른다. 불혹의 나이면 어떤 사물과 사건에도 미혹되지 않을 법도 한데, 수많은 유혹과 활활 타오르는 욕망과 치기어린 자존감은 현재진행형이다. 배우는 자(學者)의 본뜻을 망각해서일까. 아니면 세상의 잣대로부터 해방되지 못해서일까.

1995년 우연과 필연이 교차하는 인연의 끈에 이끌려 중국 대륙의 땅을 밟았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나의 시선은 중국에 머물렀고, 그 시선은 줄곧 중국의 유교철학에 향해 있었다. 4년의 시간이 흘러 배움과 물음의 진정한 가치도 모른 채, 시선은 어느덧 중국을 떠나 일본으로 향해 있었고 넓게는 동아시아의 유교철학, 좁게는 중국의 신유학(송·원·명·청의 유학)에 향해 있었다. 이러한 나의 시선은 단지 일본의 동양학(특히 중국학)에 대해 배우고 물음을 제기하기 위함이었다.

다시 일본에서의 6년 체류를 더해 총 10년의 세월이 흘러 마침내 귀국한 한국의 ‘배움과 물음의 공간’(학문 공간)은 나에게 새로운 시선을 요구했다. 그 요구에 따라 피동적인 나의 삶과 학문세계는 어느덧 또 6년의 세월이 흘렀다. 대략 6년이라는 시간 동안 나의 삶과 학문에 대한 관점과 시선은 어디로 향했던 것일까. 지금 현재는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 앞으로는 어디로 향하고 있을까.

숨기고 싶은 일이지만 현재 나의 ‘삶과 학문’에 대한 관점과 시선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교차하는 지점에서 초점조차 잡기 어려울 정도로 흔들리고 있다. 정규직이 아닌 비정규직 시간강사, 비정규직 연구원으로서의 심적 흔들림과 더불어 그 흔들림은 지속적이었고, 흔들림의 나락에 빠진 채 이미 나태함으로 변해버린 영혼은 이제 그 누구의 힐링(healing)조차 필요치 않는다. 왜일까. 나만의 문제일까. 아닐 것이다. 동시대를 사는 동세대 연구자들도 이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건 아닐까.

2006년 여름 막 귀국했을 때의 스스로에게 던진 다짐, 즉 내 학문의 길을 묵묵히 가고자 했던 의지와 믿음은 어느덧 연구소 생활에 익숙해져버린 채 ‘지식 세일즈맨’이라는 자격지심과 자학적 의식으로 변했다. 나는 요즘 몇 년 동안 폭풍처럼 집필해 양적으로 풍부해진 논문들과 역서들, 공동저서들을 볼 때면 한 없이 부끄러움을 느낀다. 부끄러움이 극에 달해 ‘나는 연구자다’라고 감히 외치지 못한다. 먹고 살기 위한 생존의 법칙이 그러하니까, 인문학계의 풍토가 원래 그러하니까, 또 여타 연구자들이 다 그러하니까라는 자기방어와 자기합리화도 이젠 위안이 되지 못한다. ‘배움과 물음의 시공간’에 운명처럼 던져진 나는, 지금까지 나의 제반 문제를 타자 혹은 외부적 요인에게서 찾았던 것은 아닐까. 또 나의 시선과 관심은 줄곧 입신에 눈 먼 나머지 대학에서의 교편 잡기와 안정적 생활에 대한 황홀한 동경만을 추구했던 것은 아닐까 반성해 본다.

시간 강의, HK사업, 정규직 교원임용, 양적 연구성과 등 학문에 대한 본질적 고민이 아니라 학문의 외적 요소에 대한 관심에만 몰두했기에 나는 스스로 삶의 존엄성과 학문의 진정성에 대한 성찰을 게을리 했고, 결국은 내 자신의 학문적 가치관마저 흔들려버린 것은 아닐까. 아마도 이러한 되물음은 끊임없이 지속될 것이고, 이 또한 앞으로의 나의 삶과 학문에 대한 시선의 방향을 바꾸어놓을 수 있는 단초가 되리라. 자성이 필요한 시점인 것이다.

중국 속담에 ‘부파만 즈파잔’이라는 말이 있다. 늦다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멈추는 것만을 두려워하라는 뜻이다. 중국에서의 유학시절 가장 애용하던 문구였지만, 요 몇 년 동안 이 말을 잊고 살았던 듯싶다. 오늘이 돼 다시 이 문구가 떠오르는 건 아마도 내 자신이 배움과 물음의 공간에서 너무 성급하게 달리다 오버페이스로 인해 멈출 것 같은 마음이 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의 상태가 꼭 그러하다.

이젠 외부 세상에 대한 비판적 시선이 아니라 나 자신의 내부로 비판적 시선을 고정시키고 싶다. 그 시선이야말로 내 삶과 학문에 대한 근원적 비판이자 배움과 물음의 시공간에서 멈추지 않기 위한 하나의 방법 찾기의 일환인 것이다. 나의 시선은 오늘 방향 전환의 기로에 서 있는지도 모르겠다. 작금의 우리네 학문 풍토도 어쩌면 나와 같은 방향 전환의 기로에 서 있는 것은 아닐까. 그 해답을 찾아 나의 시선을 배움과 물음에만 던지고 싶다.


신현승 고려대 HK연구교수·동양철학
중국 텐진사범대를 거쳐 일본 도쿄대에서 박사를 했다.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에서 중국 유교철학을 바탕으로 하면서 한국과 일본을 포함한 동아시아 유교철학의 내적 실상과 허상을 탐구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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