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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져가는 언어의 존재를 증언하는 탐사보고서
사라져가는 언어의 존재를 증언하는 탐사보고서
  • 최익현 기자
  • 승인 2012.06.26 14:3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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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들의 풍경_ 니컬러스 에번스 지음,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죽다』(김기혁·호정은 옮김, 글항아리, 2012.6)

이 책의 제목이 심상치 않다. 곧바로 부제가 이를 풀어준다. ‘사라지는 언어에 대한 가슴 아픈 탐사 보고서’다. 저자는 언어학자이자 인류학자, 통역사로 호주 토착어를 주로 연구해왔다. 특히 호주와 파푸아뉴기니의 여러 토착 부족을 직접 찾아다니면서 그들의 언어와 문화가 서로 어떤 관련성을 맺고 있는가를 살피는 ‘현장 언어학자’로 꽤나 이름을 떨치고 있다. 2010년 12월 유네스코 ‘소멸 위기 언어 레드북 홈페이지’에 우리나라 제주어가 인도의 코로어와 함께 ‘소멸 위기 언어’로 등재됐다.

제주어는 유네스코가 기준한 소멸 위기 언어 4단계인 ‘아주 심각한 위기에 처한 언어’로 규정됐는데, 이는 마지막 5단계인 ‘소멸하는 언어’ 바로 직전에 해당하는 매우 심각한 상태다. 표준어가 가져다 준 효율성은 자의적 규격화에서 배제된 숱한 방언들을 더욱 주변화했고, 제주어는 바로 그런 ‘끝’에 몰린 언어의 운명을 맞았다. 이 문제를 세계로 범위를 확대한다면 어떻게 될까.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죽다』(원제 Dying Words)의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언어학 현지답사를 하다보면 불가능할 것 같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언어들을 발견하게 되고, 이전에 생각했던 가능성의 경계를 계속 수정하게 된다. 이는 현지답사의 가장 흥미로운 점 중 하나다.” 저자가 인류학과 언어학을 접목한 노련한 현장 탐사자라는 사실을 눈여겨보자. 사라지는 언어에 대한 추상적, 규범적 논의에서 벗어나 ‘사라져가는’ 언어의 증언자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면서 겪은 구체적 기록을 내놓을 수 있었던 것도 이런 배경 때문이다.

현장성 가득한 글쓰기가 특징

그간 국내에서 이 사라져 가는 언어를 다룬 책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사라져가는 목소리들』(이제이북스, 2003), 『언어의 죽음』(이론과실천, 2005), 『언어의 종말』(작가정신, 2008), 『언어들의 죽음에 맞서라』(나남출판, 2011) 등이 언어 다양성의 위기를 논했다. 에번스의 책이 기존의 책들과 구별되는 점은 무엇일까. ‘현장성 가득한 글쓰기’를 시종일관 구현한다는 점일 것이다. 저자는 언어에 관한 법칙을 학계의 기계적·전문적 기술형태로 설명하는 것에서 탈피해, 지금 言衆이 살고 있는 이 세계의 복잡다단한 현실에서 비롯된 우발적인 상황들을 감안하며 언어를 둘러싼 문제를 ‘체험’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를 수많은 인터뷰, 관련된 참여 관찰 기록들을 통해 몸소 보여준다.

바로 이 부분이 이 책의 빛나는 특징이다. 저자가 추구하는 현장성이란, 흔히 小數 언어를 어렵게 간직하고 살아갔던 그리고 끝내 안타깝게 생을 마감하는 언어 구사자에 대한 얕은 哀悼로 귀결되는 수단이 아니다. 그것은 소수 언어의 중요성을 증언해줄 그들의 세계가 미개한 문화와 사회 구조를 갖고 있을 것이란 편견을 깨뜨리는 중요한 증거를 확보하는 무기이다. 동시에 그것은 언어학이라는 분야의 내재적 한계를 고백하면서 다양한 학문과의 협력 관계 속에서 언어 다양성의 위기를 극복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공유하는 매개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저자는 언어 다양성의 위기에 어떻게 맞서고 있을까.

이 질문을 이렇게 바꾸어도 좋을 것 같다. ‘언어 다양성의 위기에 맞선 도전이라는 메시지는 관련 학계만 받아들여야 하는 것일까?’ 이를 의식했는지 저자는 프롤로그에서 이렇게 말했다. “언어학자들과 언어공동체, 전문지식 없는 대중이 공동으로 노력해야만 이 도전에 맞설 수 있기 때문에 아는 모든 부류의 독자에게 이야기하는 방식으로 이 책을 쓰려고 노력했다.” 이런 방식과 맥락 안에서 저자는 현장 조사에서 기록한 다양하고 방대한 연구자료를 토대로 “전 세계적으로 조용하면서도 급격히 퍼져가고 있는 언어 소멸에 대해” 우리가 주의를 기울이고, 사라져가는 이 언어들에 귀기울일 것을 주문한다.

원주민과 함께 작업중인 니컬러스 에반스.
물론 저자가 독자들에게 제안한 ‘지점’을 찾아 나서려면 약간의 준비물이 필요하다. 첫째는 언어는 사회성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는 사실을 재인식하는 것이다. 둘째는 언어 생성과 소멸의 역사는 정치, 종교, 사상사의 발전과 그 궤를 같이 해왔다는 기본적인 사실을 복기하는 것. 그리고 셋째는, 사라지는 언어와 기록, 애도의 문제라는 접근틀의 이해다. 현장을 두루 돌아다니고 거기서 문제를 정면으로 풀어나가고자 하는 저자가 강조한 이 ‘사라지는 언어와 기록, 애도의 문제’는 결코 간단치 않다.

언어의 소멸 또는 기록의 문제는 반드시 매체 문화와 연결돼 있기 마련이다. 매체사에서 주로 다뤄지는 구술 문화와 문자 문화의 특성은 언어의 사라짐을 설명하는 중요한 요인이다. 그래서 저자는 ‘책’, ‘기록’, ‘기억’ 등에 두드러진 관심을 보인다. 저자는 이렇게 우려한다. “과학기술이 새로이 진보할 때마다 이를 열렬히 받아들이면 자칫 접근 불가능한 廢 매체에 기록물이 방치될 수도 있다.” 아날로그형 매체가 갖는 파손 여부도 걱정거리지만, 디지털 체제의 전환이 사라져가는 언어를 안전하게 기록하는 것을 담보하지 못한다고 경고하기도 한다.

소수 언어의 종언 혹은 애도의 윤리

저자가 현장에서 만났던 소수 언어의 마지막 증언자들도 사실상의 공동 저자들이다. 이들은 정규 학교 교육을 별로 받지 못했던 토착민이다. 그럼에도 이들은 스스로의 지식을 기록화하는 데 얼마나 직접적으로 기여할 수 있는가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칼람어 화자 샘 마즈넵의 이야기가 대표적 사례다. 마즈넵은 초등학교 2학년 정도의 교육밖에 받지 못했지만 칼람어를 기록하는 철자법에 따라 방대한 양의 민족생물학적 정보를 모아 이를 칼람어와 톡피신어로 녹음하고 노트에 잇따라 받아 적었다. 그는 인류학자 불머의 현지 보조자 역할을 수행하면서 칼람족의 전통적인 생물학적 지식을 다룬 두 권의 논문을 출간하는 데 톡톡한 공로를 세웠다. 그래서 저자는 이들을 ‘타고난 언어학자들’이라 부른다.

사실 언어 다양성의 위기와 이로 인해 점점 삶의 끝을 돌아가는 소수 언어를 간직한 마지막 증언자의 죽음, 이를 향한 애도의 윤리야말로 이 탐사 보고서의 핵심 정서일 것이다. 원고를 쓰는 가운데 호주 원주민 공동체 내 원로의 장례식을 여러 차례 주재했던 저자는 이들을 땅에 묻으면서, 이들이 구사했던 언어의 실체를 알아낼 기회가 영원히 사라져버리는 것을 목도했다.

이는 단지 소수 언어가 갖는 신기함을 체험할 기회가 사라졌다는 것이 아니라, 그 언어를 구사한 이들이 고수하는 전통과 지혜, 그리고 그것을 아우르는 문화의 여러 장면이 함께 사라졌다는 것을 뜻한다. 이것은 해당 소수 종족의 죽음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서로 연결된 온 세계 사람들, 바로 인류의 상실감과 연결된 문제다. 그는 이 씁쓸한 현실을 달라본어라는 소수어의 화자인 앨리스 뵘의 한 마디로 정리하면서 점점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져가는 언어 다양성의 위기를 논하는 탐사 보고의 대장정을 마무리한다.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내가 죽을지도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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