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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동정]시카고 대학의 개혁풍경
[해외동정]시카고 대학의 개혁풍경
  • 권진욱 기자
  • 승인 2002.07.24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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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07-24 18:36:36
미국 동부의 명문 시카고 대학이 최근 대학공동체와 지역사회가 주시하는 가운데 ‘학내 분규’를 계속하고 있다. 논란의 빌미를 제공한 것은 역사학부의 핵심교양과목인 ‘서구문명론’. 수십년간 유지돼온 현재의 틀을 대학당국과 학과교수진이 올해부터 대폭 개정시켜 실시함에 따라 일부 교수, 강사 등을 중심으로 반발하다 학생, 졸업동문, 지역언론까지 비판적 여론에 가세해 커다란 이슈로 떠올랐다. 크로니클 6월 28일자는 ‘시카고대 깍아내리기’(The Smearing of Chicago)라는 기사를 통해 최근 시카고대에서 일어나고 있는 여러 가지 동정을 비교적 상세하게 다루고 있다.

1942년에 도입했고 1949년에 만든 기본틀을 지금까지 유지해오고 있는 ‘서구문명론’은 단순히 역사적 흐름만을 점검한 것이 아니라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에서 마키아벨리, 존 로크 등까지 서구의 대표적인 원저작을 함께 읽고 토론하는, 학부과정의 가장 혹독한 핵심교양 과목으로 꼽힌다. 올해부터 변경된 과정은 이 과목의 교재인 ‘서구문명강독’을 대폭 개정하고, ‘서구문명’ 3학기 과정을 ‘유럽문명’과 ‘고대지중해세계’의 2학기 과정으로 통폐합시키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다.

이에 대한 거부감은 엄청나다. 특히 보수성향의 언론, 교수들은 한 목소리로 개편에 반대하면서 ‘시카고대 깍아내리기’에 가담하고 있다. 보수 성향의 ‘내셔널 리뷰’ 편집자인 스탠리 커츠는 “고전시기와 중세시기의 연계를 잃는다.”라고 비판하는가 하면 이 대학 정치학과 출신의 변호사 로버트 스톤은 “보통 수준을 향한 하강과정의 이정표가 될 사건”이라며 아예 반대 웹사이트를 만들어 운영하고 있다. 국립학술협회 기관지도 “강사들이 유연성을 갖게 됨에 따라서 ‘서구문명 강독’ 교재를 택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라고 주장한다. 워싱턴 타임즈는 “기독교 정신과 후기 고대 부분이 누락될 것”이라고, 시카고 트리뷴도 “새 과정은 전에 비해 덜 엄격해질 것”이라고 걱정을 보태고 있다.

그러나 정작 시카고대와 역사학과의 해당 교수진들은 “내용이 유연해지는 것은 사실이지만 교재는 점차 더 추가해서 정례화할 것”이라며 동문과 언론의 반대 움직임에 정색을 하고 있다. 역사학부 교수들은 이들의 비판에 조목조목 답한다. 국립학술협회 기관지 내용에 대해서는 “‘서구문명 강독’에 실린 고전들은 계속 채택될 것이고, 강의에 유연성을 더 많이 주기보다는 분과에 관계없이 통일성을 줄 것”이라고 항변하는가 하면 워싱턴 타임즈에 대해서는 “고대 지중해 세계에서 더욱 심층적으로 다루게 될 것”이라고, 시카고 트리뷴에는 “유럽역사 자체가 너무 방대해서 특화시키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응수하고 있다. 한마디로 강의 수준이 결코 뒤떨어지지 않는데도 일부 반대세력과 지역언론들이 실제 개편안을 제대로 확인하지도 않은 채 왜곡된 정보를 남발하고 있다는 것이다.

응용학문보다는 기초학문에 더욱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시카고대의 전통을 생각한다면 이런 개편에 대한 반발 움직임은 당연히 예상된 것이었다. 하지만 반대론자들은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대폭적인 개혁작업에 착수했던 바로 전임총장 손넨샤인에게로 화살을 돌리고 있다. 그들은 역사학부의 ‘서구문명’ 과정 개편이 손넨샤인이 시카고대를 ‘재미있는 학교’로 만들려 했기 때문에 벌어지게 된 상징적인 사건으로 해석한다. 현재 경제학부 교수로 있는 손넨샤인은 총장 재임 기간 동안 학부생 정원을 1천여명 증원, 4천5백여명으로 만들었으며 틈날 때마다 이웃한 브라운대나 예일대 등과 비교하면서 ‘응용학문 육성’을 부르짖었다. 또한 기부금을 대폭 늘렸고 1904년부터 내려오던 ‘손바닥만한’ 스포츠센터를 ‘올림픽 수영장만한’ 크기로 만들기 위한 공사에 착공했다. 손넨샤인의 의도는 눈에 띄는 지표로만 본다면 확실히 성공한 것으로 나타난다. 1996년 5천4백19개의 응용과정들이 지금에 와서는 8천1백89개로 늘어났고, 매학기 등록학생이 4천여명을 상회하고 있다. 또한 지난 수년간 학부 신입생들의 SAT성적이 대폭 향상됐으며 내년이면 5천1백만 달러짜리 스포츠센터가 개방된다. 학교 이미지에 대한 설문조사에서도 재학생의 99퍼센트가 시카고대를 ‘지성적’이라고 답한 반면 1퍼센트만이 ‘즐기는’ 곳이라고 대답했다.

'서구문명’ 과정의 개편에 대한 논란은 기초학문에 대한 유서깊은 자존심을 갖고 있는 시카고대가 최근 급변하는 사회와의 균형감각을 맞추기 위해 당연히 겪어야할 진통을 엿보게 한다. 이 논쟁은 역사학부 교양과정에 관한 내용이 해명되더라도 앞으로도 당분간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수강생 4십여명 수준의 학부과정의 교양 과목 하나가 통폐합된다고 해서 이렇게 지역사회와 언론들이 ‘목숨걸고’ 달려드는 것 자체가 우리에게는 엄청난 교육 기반임에 틀림없다. 그렇지만 더욱 대단한 교육 기반은 이런 작은 사안에서 대학개혁 방향에 대한 논의의 물꼬를 틔울 수 있는 그들의 관심이라고 해야할 것이다.

권진욱 기자 atom@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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