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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천주의 법’을 바라보는 동아시아의 두 시선
17세기 ‘천주의 법’을 바라보는 동아시아의 두 시선
  • 윤상민 기자
  • 승인 2012.05.29 16:0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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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제의 논문_ 「아담 샬 신부, 순치제, 소현세자」(<인간환경미래> 제8호)

역사에‘IF’는 무용하다. 하지만 만약 청의 신문물에 눈을 뜬 소현세자가 왕이 됐다면 지금의 한국은 다른 나라가 됐을 것이라는 데 이의를 제기하는 역사가는 별로 없을 것이다. 동아시아 삼국 중에 가장 개항을 먼저 한 일본보다도 200년을 앞설 수 있는 기회였기 때문이었다.

안재원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HK연구교수는 그의 논문「아담 샬 신부, 순치제, 소현세자-아담을 바라보는 두 시선 사이에 있는 차이에 대해서」<인간환경미래 > (제8호)에서 소현세자가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있던 기간 동안, 서양 학문에만 관심을 가진 것이 아니라 천주교를 수양 차원이 아닌 종교 차원으로 대했다고 주장한다. 안 교수는 아담 샬 신부를 바라보는 순치제의 시선, 소현세자의 시선을 서신을 인용하며, 천주교를 받아들이는 두 나라의 차이점에 대해 흥미로운 시각을 제시하고 있다.

 

논문의 주 자료는 아담 샬 신부가 쓴『1581년에서부터 1669년까지 키나에서 그리스도교의 옳은 신앙을 포교하기 위해서 활동한 예수회 신부들에 대한 보고: 그 시작과 전개를 중심으로』(이하『중국포교사』)의 라틴어 원전이다. 그는『중국포교사』의 핵심을 서양 천문학이 동양 천문학과의 대결에서 승리한 것으로 정의한다.  

황제국 명나라를 멸망시키긴 했으나, 청나라는 흩어져 살던 여진족이 세운 나라다. 순치제는 군사력으로 중원의 황제가 됐지만, 자신을 만주의 오랑캐에 불과하다고 보는 한족을 제압할 필요성이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아담 샬 신부의 시헌력은 최고의 논거가 됐다.

『중국포교사』, 서양천문학 승리의 기록

안 교수는 “순치제가 ‘천주의 법’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보였지만, 그것은 천주교의 교리를 유교나 불교와 같은 심급에 있는 한 가르침 정도로 이해하고 있다”라고 분석한다. 순치제는 ‘천주’의 ‘제자’가 될 이유를 찾지 못했을 것이고, 자신이 天子라는 것이 근본적인 이유라고 안 교수는 말한다. 천주교에 대한 순치제의 이해 정도는 아담 샬 신부를 ‘훌륭한 덕’을 지닌 신하로 보는 점에서도 드러난다.

안 교수는 앞선 두 논의를 통해 아담을 바라보는 순치제의 시선에서 이미 西學과 西敎의 구분이 발견됨을 끌어낸다. 순치제는 서양학문의 탁월함에 대해서는 지극한 예찬을 하는 반면, 서양의 종교에 대해서는, 그것을 신하 아담 샬 신부의 개인적인 덕성으로 국한시켜버리
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안 교수는 “중국에서의 서양 학문과 서양 종교의 분리-수용 전통은 아마도 순치제의 시선에서부터 시작됐을지도 모르겠다”라고 추측한다.

반면 아담 샬 신부를 바라보는 소현세자의 시선은 순치제의 그것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중국포교사』에는 소현세자가 아담 샬 신부에게 직접 쓴 편지가 라틴어로 번역돼 있다. 이 편지에서 소현세자와 아담 샬 신부는 군신이 아니라 친구 혹은 형제 관계다. 이는 세자의 “마치 같은 피로 맺은 친구처럼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게 됐습니다”라는 언명에서 확인된다. 순치제가 아담의 충성스러운 덕목을 부각한다면 소현세자는 아담의 우정과 호의를 강조한다. 이에 대해 안 교수는 “패전국 세자에게 신부가 보여준 호의와 환대가, 특히 나라를 다시 부강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마음을 심중에 품고 있던 세자에게는 큰 감동이었음이 분명하다”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천주의 법’을 바라보는 소현세자의 입장은 어땠을까. 소현세자는 서신에서“책들이 마음을 깨끗하게 정화하고 덕을 닦는 데에 가장 적합한 가르침을 담고 있음을 깨닫게 됐습니다”라고 고백한다. 순치제와 달리 세자 자신이 유교의 가르침을 암묵적으로 비판한 것이다. 이는 “코레아인들이 지켜왔던 잘못된 가르침의 숭배 전통으로 말미암아 그 분의 위대함이 공격 당하지나 않을까 두렵습니다”라고 말하는데서 그 전거를 찾을 수 있다. 그럼에도 세자는 세례를 받지 않았다. 그것이 오히려 세자를 반대하는 고국의 세력들에게 공격의 빌미를제공할지도 모른다는 염려 때문이라고 안 교수는 추정한다. 소현세자는 귀국 후 2개월 만에 사망한다.

비운의 왕세자에서 서학의 선구자로

아담 샬 신부의 남당 봉헌 이후, 청에서는 30년이 채 안 되는 기간 사이에 240여 곳에 성당이 세워진다. 1681년 집계 기록을 보면, 당시 중국의 천주교 신자 수는 26만명이다. 1690년에는 강희제로부터 종교활동에 대한 자유를 보장받는다. 예수회가 중국에 들어온 지 100년만의 일이다. 마테오 리치와 같은 선배 선교사들의 포교노력도 중요했지만, 아담 샬 신부의 공로를 무시할 수 없다. 17세기 말까지 중국의 천주교는 파죽지세의 위용을 떨쳤다. 그러나 중국의 현재를 볼 때, 안 교수는 “적어도 예수회의‘위로부터의 포교 전략은 실패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와 관련해 정체불명의 ‘코레아 환관’을 이야기한다. 소현 세자는 귀국을 앞두고 서양의 학문과 종교를 체계적으로 배우라고 아담 샬 신부의 종자로 내시 한 명을 북경에 남겨뒀다. 이 내시가 조선인 가운데 중국에서 최초로 세례를 받았을 지도 모른다고 안 교수는 추정한다. 실제로 이 내시는 아담 샬 신부가 죽는 날까지 그 곁에서 보필했음이 기록에 드러난다. 아담 샬 신부에게 죽음이 임박하자 신부가 자신의 생애와 활동을 정리하기 위해 내시를 불러 기억을 되살려냈다는 데서 확인된다.

그렇다면 안 교수는 왜 이 이름 없는 내시를 중요하게 생각할까. 그것은 소현세자를 ‘비운의 왕세자’정도로만 보는 세간의 평가를 바꾸려는 시도이기 때문이다. 안 교수는 조선의 서학 수용관 관련한 이 환관의 역할, 소현세자가 심양으로 데려간 300명(이후 북학파, 실학파 등장에 매개가 된 이들이란 의미에서) 등으로 시야를 소현세자, 그리고 그와 함께 했던 집단 전체로 확장시킨다. 안 교수는 이 경우 조선의 서학 수용과 개방에 대한 논의가 새로운 지평을 열 것이 분명하다고 보았다. 소현세자의『심양일기』를 필두로 조선 서학 수용사 연구의 필요성도 환기시켰다.

안 교수는『중국포교사』의 표준정본이 없음을 아쉬워하며 “순치제가 서양 종교와 서양 학문을 분리해서 받아들이려 했다면(중체서용론의 효시), 코레아인들은 정신 문명의 제도적 실체인 서양 종교 ‘천주의 법’을 마음 속 깊이 받아들이려 했다”라고 조선과 청의 차이점을 짚어냈다.

 

윤상민 기자 cinemonde@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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