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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픈 권력이 아니라 즐거운 일상의 공간으로
아픈 권력이 아니라 즐거운 일상의 공간으로
  • 이상봉 부산대 HK교수
  • 승인 2012.05.21 14:14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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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 한국을 만든 40곳]<3> - 남산

서울의 한가운데 자리한 남산은 높이 262m의 그리 높지 않은 산으로 서울에서 가장 넓은 공원이다. 애국가의‘남산위에 저 소나무’구절을 떠올리듯 소나무를 비롯한 각종 수목이 울창하고 서울타워에 오르면 서울의 풍광이 한눈에 들어온다.

남산이라는 이름을 들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무엇일까. 개인의 기억과 삶의 방식에 따라 그 표상은 매우 다양할 것이다. 특정 공간에는 그 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과 결부돼 그 때마다 고유한 장소성이 부여되며, 겹겹이 누적된 장소성의 기억은 현재의 필요에 따라 다시 호출되기도 하고 묻히기도 한다. 특히 조선왕조에서 일제강점기 그리고 대한민국 역대 정권들을 거치면서 궁궐-총독부-청와대라는 권력의 심장부에 의해 장소성이 덧칠돼온 남산은 그야말로 파란만장한 역사를 가진 곳이다.

해방 직후 미군이 찍은 조선신궁의 전경

조선신궁으로 훼손된 靈地

남산이라는 공간이 지닌 토폴로지와 역사의 아이러니를 더듬어보자. 남산의 옛 이름은 引慶山이다. 남산이라 불리게 된 것은 1394년 이성계가 개성에서 한양으로 도읍을 옮긴 이후다. 남산의 한자표기인 南은 앞을 뜻하기도 한다. 경복궁에서 바라봤을 때 앞에 위치했기에 남산이라 불렸다. 궁궐을 중심으로 남산은 풍수지리상 案山에 해당한다. 안산은 집이나 묘지 맞은편에 있는 산으로, 뒷산인 主山그리고 좌청룡ㆍ우백호와 함께 운수와 기운이 서려있다는 곳이다. 조선왕조는 이러한 남산의 정기를 받기 위해 이곳을 木覓大王으로 봉하고 木覓神祠를 지어 호국의신으로 삼았다. 지금의 팔각정 자리다.

조선왕조라는 권력에 의해 靈地로서의 장소성이 부여된 남산은 권력의 주인이 바뀌면서 새로운 장소성으로 덧칠된다. 조선을 강제 침탈한 일제는 남산자락에 침략신사인 조선신궁을 건립한다. 조선왕조를 폄훼하고 황국사관으로 조선인의 정신을 지배하기 위해서다. 1925년 완공된 조선신궁은 일본의 국가신도계열 신사 가운데 가장 격이 높은 官幣大社로, 아마테라스 오미카미와 메이지텐노를 主神으로 삼는 신사였다.

남산에는 조선신궁 이외에 京城神社등이 있었고 조선 도처에 많은 신사들이 만들어졌지만 조선신궁은 그 가운데 우두머리였다.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일제는 숭례문 옆 담장을 훼손해 아치 형식의 석문을 설치하고 신사 참배로의 입구로 삼았다. 이 길을 따라 해마다 신사참배를 강요당한 조선인들은 숭례문과 석문의 대비를 통해 권력과 장소성의 변화를 실감했을 것이다.

조선총독부의 신사참배 강요는 중일전쟁이 시작된1937년 이후 더욱 심해진다. 기독교도를 중심으로 신사참배 거부 운동이 일어난 것도 이때며, 이 시기는 특히 미국과 일본의 관계가 악화되면서 제암리사건 이후 암묵적으로 용인되던 약간의 종교적 자유마저 없어진 때다. 신사참배 거부 운동은 광범위하게 전개됐고 그 결과 200여개의 교회가 폐쇄되고 50여명의 교인이 옥사했다.

당시 신사참배 강요에 반발한 세력가운데 하나가 미션스쿨이다. 집단참배 거부를 이유로 상당수의 미션스쿨이 폐교됐는데 평양 숭의학원도 그 중 하나다. 당시 조선신궁이 있던 자리는 현재 숭의여자대학이 차지하고 있다. 일제가 패망하면서 조선신궁이 철거됐고 그 자리를 폐교됐던 숭의학원이 다시 차지한 것이다. 그야말로 역사의 아이러니다.

남산에 아픈 기억을 남긴 것은 일제만이 아니다. 과거 민주화운동을 경험한 세대들에게 남산은 중앙정보부로 기억된다. 박정희와 전두환으로 이어지는 독재정권이 민주화 인사들을 잡아가던 중앙정보부(1961년 설립)와 그 후신인 국가안전기획부 본관(현재 서울 유스호스텔)과 악명 높던 별관들(현재 서울종합방제센터, 서울시 남산별관 등)이 남산 자락에 자리했기 때문이다.

반전과 아이러니로 점철된 역사

1972년 지어진 중정 남산본관은 최종길교수가 고문으로 사망한 것을 비롯해 1996년 내곡동으로 옮겨가기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유린당한 아픔의 현장이다. 남산자락 도처에 산재한 일명 ‘하얀 집’들은 쥐도 새도 모르게 끌려가 죽거나 병신이 돼 나오는 공포의 상징이었다. 이곳에 끌려와 고문당한 김대중은 나중에 이곳을 관장하는 청와대의 주인이 된다.

이처럼 반전과 아이러니로 점철된 남산의 역사를 유심히 살펴보면 그 속에는 경복궁-목멱신사, 총독부-조선신궁, 청와대-중앙정보부라는 권력의 관계맺기, 즉 공간의 권력성이라는 토폴로지가 관철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남산의 장소성은 권력에 의해 유린된 것이다.

남산은 지금도 역사적 기억과 재현을 위한 투쟁의 장이다. 서울시 새청사의 건립과 함께 옛 중정건물에 있던 시설들이 옮겨가게 되자 이곳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를 두고 의견이 맞서고 있다. 민주화운동세력은 이곳에 기념관을 설치하고 남산을 ‘인권과 평화의 숲’으로 만들자고 한다.

남산이 위치한 중구의회 의장은 그동안 권력기관에 빼앗겼던 남산을 인근 주민들에게 돌려줘야 한다면서 시민체육시설 설치를 촉구한다. 뿐만 아니다. 일본 관광객 가운데는 신사의 흔적이 거의 없음을 아쉬워하는 자도 있고, 기독교인 가운데는 신사참배를 거부하다 희생된 자들을 기리는 공간이 됐으면 하고 바라는 이도 있을 것이다.

그것이 어떤 형태든 남산이 겪은 능욕과 아픔이 권력에 의해 포섭된 장소성, 즉 권력성의 토폴로지가 낳은 결과라는 점을 상기한다면 이제 남산을 시민을 위한 공간, 일상을 위한 공간으로 되돌려야 하지 않을까. 그렇다고 시민을 위한 체육시설을 설치하는 것이 능사는 아니다.

과거의 기억을 간직하면서도 그것이 현실의 삶을 풍부하게 할 수 있어야 한다. 남산이 다시는 권력에 의해 아픔을 겪지 않았으면 하는 다짐 또한 일상의 색채를 통해 드러냈으면 한다. 첫 데이트의 설렘, 맹세의 열쇠 철망에 걸어둔 소망, 가족 나들이의 화목함, 산책로에서의 상쾌함 등과 같은, 권력의 아픔이 아닌 일상의 즐거움으로 기억되는 공간이 됐으면 한다.

 이상봉 부산대 HK교수·정치학
부산대에서 박사를 했다. 최근 지역정치와 공간정치 연구에 관심을 쏟고 있다. 논문으로「오사카 조선시장의 공간 정치」,「 대안적 공공공간과 민주적 공공성의 모색」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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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은이 2015-04-15 13:54:39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이상한 부분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세월이 지나도 수정이 되지않아 글을 올려 봅니다. 혹시 생각하신 부분과 다르다는 의견입니다.
조선신궁 자리에 숭의여대가 있다고 한 부분인데 제가 알기로는 숭의여대는 국폐소사인 경성신사가 있던 곳으로 알고 있습니다. 아주 예전 남산공전, 리라초교, 숭의여전이 그 자리라고 알고 있었는데ㅔ 조선신궁과는 관련이 없는 듯 합니다. 일본에서 발행한 경선신사 평면도에도 왜성대공원에 들어산 경성신사가 나오고 조선신궁참배길이 표시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둘의 관계는 별로 없는 듯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