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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작가의 뮤즈'를 넘어 '시대의 아이콘'을 만들었을까
무엇이'작가의 뮤즈'를 넘어 '시대의 아이콘'을 만들었을까
  • 윤상민 기자
  • 승인 2012.05.21 13:2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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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제의 영화_ 「은교」

여성의 몸을 향한 욕망은 영화의 단골소재다. 현재 흥행 상위권에 있는「은교」부터「간기남」, 깐 영화제 경쟁부문 초청작「돈의 맛」, 개봉을 기다리는「후궁」까지, 스크린의 열기가 후끈하다. 마케팅 전략도 비슷하다. 하지만, 「은교」는 ‘노출’, ‘로리타 컴플렉스’라는 키워드로만 읽히기엔 좀 억울한 영화다. ‘은교’역을 맡은 배우 김고운의 아우라 때문이다.

「은교」는 박범신의 2010년 동명소설이 원작이다. 소설이 영화화 될 때, 대개는 우려 반, 기대 반으로 극장을 찾는다. 기대는 어김없이 관객을 배반한다. 찰스 디킨스의 『위대한 유산』(1861)이 영화로 각색되면서, 원작의 진정한 신사 매부 조는 돈밖에 모르는 속물로 그려지지 않았던가. 그렇다고 실망할 건 없다. 영화「위대한 유산」(1998)을 보고 난 관객에게는 영화사적으로 명장면에 꼽히는 핍과 에스텔라의 눈부신 분수대 키스신 이미지가 남았으니.

원작을 똑똑하게 차용한 영화

그런 의미에서 영화「은교」는 원작을 매우 똑똑하게 차용했다. 은교(김고운 분),서지우(김무열 분), 이적요(박해일 분) 세 사람의 관계에 집중하기 때문이다. 이건 정지우 감독의 특기다. 「해피엔드」(1999),「사랑니」(2005) 를 연출하고「이끼」(2010) 각본을 쓴 그에게 등장인물들의 감정선과 욕망의 충돌을 표현하는 건 쉬운 일이다. 그는「은교」에서 젊음과 늙음의 극명한 대비를 세 사람을 통해 풀어간다.  

17살 은교의 빛나는 육체는 하나의 메타포다.
리얼리즘과 서정미를 통합시켰다고 평가받는 시인 이적요. 아내처럼, 자식처럼 스승의 수발을 드는 제자 서지우. 이들의 ‘적요’한 회색빛 일상은 열일곱 은교의 등장으로 산산이 부서진다. 일흔의 시인은 열일곱 은교를 통해 가장 빛나던 시기로 돌아가 아름다운 소설을 쓴다. 하지만 현실의 이적요에게는 여고생과의 추한 놀음임을 직시해야 하는 늙어감과 말년의 서러움만이 있을 뿐이다. 재능 없는 서지우는 그저 스승의 옆자리를 뺏길까 질투, 두려움에 몸서리친다. 카메라는 세 사람의 감정선을 때론 천천히 때론 숨가쁘게 따라간다. 하지만 정 감독의 역할은 거기까지다.  

은교의 첫 등장씬. 카메라는 이적요의 시선으로 오랜 시간 은교의 육체를 탐닉한다. 티 없이 맑은 얼굴 클로즈업에서 감은 눈, 반쯤 벌어진 입술로, 다시 카메라는 매끈한 목선을 타고 내려온다. 움푹한 쇄골에 한참을 머물다 카메라는 이적요의 손이 돼 그녀의 몸 구석구석을 훑는다. 은교의 까진 무릎의 선홍빛 핏자국마저 새하얀 피부와 대비되며 싱싱한 생명력을 뿜어낸다. ‘몸’으로 세상을 바라보려했던 메를로 퐁티를 빌리지 않더라도, 젊은 육체가 발하는 눈부신 순백의 싱그러움은 객석을 한순간에 휘어잡는다. 이적요의 상상 속 은교 역시 핸드헬드 기법으로 날아갈 듯 경쾌한 청춘의 아름다움을 잘 포착해 냈다.「은교」가 데뷔작이 된 어린 여배우에 대한 연기평이 아니다. 스크린 속의 이적요와 서지우를 홀려버린 싱그러운 젊음의 아우라는 스크린을 넘어 객석의 관객들에게도 강렬하게 스며든다. 이로써‘김고운’은 원작, 영화, 스크린을 넘어서 가장 아름다운 젊음의 아이콘이 됐다.

육체의 소녀성과 노년의 비유

「은교」는 늙어감을 다룬 영화다. 좀 더 잔인하게 얘기하면, 외면하고 싶던 늙어감을 젊은 육체를 통해 자각하고, 이로 인해 형벌과도 같은 고통을 받는 이야기다. 이적요는 그의 소설 속에서 은교와 함께 빛났다. 하지만 현실의 그는 나무 껍데기처럼 슬프다. “너희 젊음이 너희 노력으로 얻은 상이 아니듯, 내 늙음도 내 잘못으로 받은 벌이 아니다”라는 시인의 고백은 그래서 더욱 처절하다. 늙지 않는 마음과 늙어가는 육신. 유한의 존재가 죽음으로 달려가며 얻게 되는 삶과 존재에 대한 깊은 성찰. 에로스와 타나토스의 교차, 흐르는 세월에 대한 안타까움.

원작과 영화를 초월한 김고운의 ‘은교’ 이미지는 서점가와 극장을 넘어 광고계, 방송계로 확장되고 있다. 순식간에 한 시대의 아이콘이 돼버린 ‘김고운’. 그녀는 어느새 늙어감에 대한 가슴 아픈 類比가 되고 말았다. 그것은 그녀가 가진 ‘육체의 소녀성’ 때문이기만 할까.

 

윤상민 기자 cinemonde@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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