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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와 혼인한 사람에게 3도를 주겠다!
공주와 혼인한 사람에게 3도를 주겠다!
  • 김경옥 목포대 도서문화연구원ㆍHK연구교수
  • 승인 2012.05.09 1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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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이야기 ② 전남 신안군 하의삼도 ‘정명공주 이야기’

하의삼도는 하의도·상태도·하태도를 지칭한다. 전라남도 신안군 하의면과 신의면을 구성하는 3개의 섬이다. 이곳 주민들에게 조선 선조의 맏딸 정명공주이야기가 전해온다. 한양으로부터 천리 밖에 떨어져있는 외딴 섬마을에서 왜 공주이야기가 회자되고 있을까.

처음 하의도를 찾은 육지 사람은 선창에 배가 닿는 순간, 조금은 당혹스러움을 느낄 것이다. 분명 목포에서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왔건만, 정작 눈앞에 펼쳐진 섬마을의 풍경은 마치 어느 농촌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 닮은꼴이기 때문이다. 적어도 ‘섬’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비릿한 바다 냄새, 어장에서 갓 돌아온 어부의 건강한 웃음소리, 만선을 기다린 아낙네의 밝은 표정, 그리고 마냥 기분 좋아 뛰어다니는 아이들의 모습 등이 아닐까. 그런데 정작 하의삼도 어디에도 방금 바다에서 건져 올린 어패류를 찾아볼 수 없다. 대신 짙푸른 들녘이 육지 사람을 환영해준다. 섬에서 농업에 종사하는 이가 많은 이유는 모두 간척의 결과다. 

하의도를 찾은 사람은 선창에 배가 닿는 순간, 조금은 당혹스러움을 느낄 것이다.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왔건만, 정작 눈앞에 펼쳐진 섬마을의 풍경은 마치 어느 농촌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 하기 때문이다. 사진은 전남 신안군 하의도에서 가장 큰 대리마을 전경이다. 마을 중앙에 故 김대중 대통령이 한문을 배웠던 덕봉강당이 있다.

전통시대 도서지역의 토지는 갯벌에 둑을 쌓아서 만들었다. 섬 주민들은 밀려오는 바닷물을 차단하기 위해 갯벌에 제방을 쌓았다. 여러 번의 시행착오를 겪은 끝에 짠물을 머금은 간척지가 모습을 드러낸다. 하지만 당장 농토로 이용할 수 없다. 아직 온전한 땅이 아니어서 식생에 적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섬 주민들은 오랜 시간 정성들여 개토를 했다. 중도에 둑이 무너지면 제방 쌓기를 반복했다. 간척지에서 짠 물이 빠지는데, 족히 10년이 걸렸다. 이런 과정을 거쳐서 섬마을에 토지가 마련됐다. 그런데 어느 날, 새로운 토지 주인이 등장한다. 섬마을의 땅은 할아버지가 아버지에게, 아버지가 또 그의 아들에게 대물림을 하며 경작해왔건만, 육지의 세력층이 토지소유권을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

18세기 하의삼도 주민들은 한성부에 토지 소유권 소송을 제기했다. 그래서일까. 3섬 주민들에게 전해오는 정명공주이야기는 아름다운 동심의 세계와는 전혀 무관하다. 토지소유권 분쟁이 정명공주방으로부터 시작됐기 때문이다. 섬 주민에게 전해오는 정명공주이야기는 대강 이러하다. “선조의 첫째 딸 정명공주는 나이 스물이 됐지만, 혼례를 올리지 못했다. 어린 시절 공주는 소아마비를 앓았고, 그로 인해 불구의 몸이 됐다. 선조는 과년한 딸을 시집보내기 위해 ‘공주와 혼인한 사람에게 3도를 주겠다’고 방을 붙였고, 당대의 가객 홍주원이 ‘공주와 혼인하겠다’고 나섰다. 문제는 왕과 부마의 꿈이 다른데 있었다. 부마가 꿈꿨던 3도는 경상도·충청도·전라도 등 하삼도였고, 국왕 선조는 나주목의 부속도서인 하의도·상태도·하태도 등 3개의 섬을 부상으로 내걸었던 것이다. 선조는 홍주원에게 3섬을 하사했다”라는 이야기다. 구전에서 알 수 있듯이, 하의삼도의 토지 일부가 정명공주에게 지급됐고, 그로인해 왕실과 섬 주민들 간에 토지세 부과로 인한 갈등이 발생한 것이다.

그런데 하의삼도 주민들에게 전해오는 정명공주이야기는 등장인물의 생존 시기를 비교해 보면, 많은 오류가 발견된다. 예컨대 조선 선조의 재위기간은 1567∼1608년이고, 정명공주가 세상에 태어난 것은 1603년이며, 홍주원이 공주와 혼례를 올린 것은 인조반정(1623) 이후이다. 따라서 섬마을에 전해오는 공주이야기는 다소 과장돼 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공주이야기를 통해 섬마을 토지에 얽힌 권력층의 횡포가 얼마나 극심했는가를 미루어 짐작케 한다. 본 소송사건을 담당한 사헌부가 최종 판결에서 권력층의 부당함을 지적했다. 그러나 끝내 공주방에서 섬 주민의 토지세를 조정해 주지 않았다.   

하의3도 농민운동 기념관, 하의면사무소에서 대리마을로 가는 길에 위치한다.

20세기 초에 하의삼도 사람들은 일본인 지주를 상대로 토지소유권 반환소송을 제기했다. 또 미 군정기에는 소작료 강제징수에 따른 도서지역의 농민운동을 전개했다. 마침내 1950년 2월, 대한민국 국회는 하의삼도 주민들에게 ‘토지 소유권 무상 반환’을 결의해주었다. 300년 동안 대를 이은 섬 주민들의 토지 소유권 분쟁의 결과였다.      

김경옥 목포대 도서문화연구원ㆍHK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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