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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학’이라는 외투를 걸치고 나타난 것의 정체는?
‘미학’이라는 외투를 걸치고 나타난 것의 정체는?
  • 김용우 한국교원대 강사
  • 승인 2012.05.07 1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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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제의 논문_ 「식민주의의 그늘: 새로운 세계사와 서구 포스트-식민 박물관의 경우」

왜 박물관의 원시인은 다 흑인일까. 그리고 문명의 개척자들은 우아한 콧수염을 만지작대는 백인들인가. 경쟁적으로 지어졌던 식민주의 산물인‘박물관’들이 포스트-식민박물관으로 외투를 바꿔입고 있다. 하지만 그 속내를 들여다보면 유럽중심주의 시각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부산대 인문학연구소가 발행하는 <코기토> 17호에 실린 김용우 한국교원대 강사의 논문(「식민주의의 그림자들: 새로운 세계사와 서구 포스트-식민박물관의 경우」)이 이런 주장을 펼치고 있다. 그는 프랑스의‘케 브랑리 박물관’과 미국의‘국립 아메리카 인디언 박물관’을 사례로 유물의 역사는 배제된 채 심미적 가치만으로 문화적 소통을 바라는 포스트-
식민박물관의 모순을 지적하면서, 역사학 인식론 자체의 대안을 고민한다.

서구 박물관들이 변신을 거듭하고 있다. 18세기 영국과 프랑스를 필두로 그리고 19세기 유럽과 미국에서 붐을 일으키며 도처에서 건립된 박물관들은 그 동안 끊임없이 변화를 모색해왔다. 그러나 21세기 들어 시작된 변화는 이전의 그것과 궤를 달리한다. 무엇보다도 변화의장소가 다르다. 변화의 핵심에는 19세기 유럽 각국에 건립된 ‘식민박물관(colonial museum)’이 있다. 이들 박물관은 아프리카, 오세아니아, 아메리카 지역 유물을 주로 수집, 연구, 전시했기에‘인류학 박물관’이라 불리기도 하지만 수집과 전시 모두에서 식민주의와 불가분의 관계를 맺는 명백한‘식민박물관’이다.

서구 박물관의 변신과 포스트모더니즘

식민박물관이 포스트-식민박물관으로 이행을 시도하고 있다. 영국, 프랑스, 벨기에를 비롯한 거대한 해외식민제국을 건설했던 나라 뿐 아니라 미국이나 호주처럼 원주민을 정복했던 나라에서 대대적인 식민박물관의 지형도 변화가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왜 이러한 변화가 발생하고 있는가. 포스트-식민박물관으로의 전환은 성공적인가. 이러한 전환이 남긴 교훈은 무엇인가. 이 글이 제기한 문제의식들이다. 그리고 이러한 문제에 답하기 위해 선택된 주요 사례는 2006년 개관한 프랑스 파리의‘케 브랑리 박물관’과 2004년 문을 연 미국 워싱턴 DC의‘국립 아메리카 인디언 박물관’이다.

변화의 배경에는 다문화주의, 포스트-식민주의, 이주민(원주민)의 사회 통합을 둘러싼 갈등 등의 다양한 요소들이 있다. 그런데 왜 박물관인가. 식민주의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소수자, 이주민, 원주민과 그 후손들을 사회적으로 통합하는 일에는 정치, 경제, 사회적 처방 뿐 아니라 문화적‘인정’이 중요하다. 정치, 사회, 경제적 정의 못지않게 문화적 인정은 인간 삶에서 무시할 수 없는 가치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박물관을 비롯한 문화 영역의 변화를 현실을 호도하기 위한 책략 정도로 치부하는 접근은 편파적이다. 빵 없이 살 수 없지만 자신의 가치에 대한 타자의 인정 없는 삶 역시 비인간적이기는 마찬가지다. 더 이상 낡은 식민박물관의 틀을 유지하기 어렵게 만든 요인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렇다면 이행은 성공적인가.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먼저‘국립 아메리카 인디언 박물관’은 인디언들과 긴밀한 협력 아래 만들어진 대규모 공공박물관이라는 점에서 큰 관심을 끌었다. 그러나 결과는 만족스럽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이 박물관의 큐레이터가‘박물관 자체의 존재 근거’라 자평할 정도로 중요성을 인정한‘증거’라는 상설 전시실은 당혹스럽기까지하다. ‘증거’전시에는 애초부터 인디언 공동체의 참여가 배제되었을 뿐 아니라 이 전시가 던지는 메시지 때문이기도 하다.

‘증거’는 1491년, 그러니까 콜럼부스의 아메리카 상륙 직전부터 이른바 아메리카 정복의 역사를 재현하는 공간이다. 그러나 무기, 황금, 성서 등을 각각 담고 있는 전시함들이 단순 병립해 있는 이곳에는 많은 역사가들이 공들여 입증한 정복과 약탈과 살육의 사실들은 어디에도 그 선명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많은 비평가들은 이 전시실에 대해 아메리카 정복에 대한 인디언 중심주의를 해체하려는 포스트-모던한 역사 해석이라 지적한다. 아메리카 인디언의 역사와 문화를 전시하는 대표적인 공공 박물관에서 왜 유독 아메리카 정복의 역사는 끊임없이 재해석될 수 있는‘열린’담론이어야 하는가. 아메리카 인디언들에 대한 뿌리 깊은 식민주의적 관점이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화려한 외투를 걸치고 다시 나타난 것은 아닌가.

다른 한편 파리 센 강변의‘케 브랑리 박물관’의 상설 전시실에는 역사가 삭제된다. 아프리카, 오세아니아, 아메리카 지역의 유물들을 이제 거의 독차지해 약 30만점에 달하는 소장품을 자랑하는 이 박물관은 문화들 사이의 평등과 소통을 모토로 내걸었다. 그러나 이러한 평등과 소통은 오로지 유물의 심미화를 통해서 성취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이 박물관의 상설 전시관은 웅변한다. 유물의 기원, 용도, 수집과정 등에 대한 정보는 아예 없거나 최소화된다. 어두운 전시 공간에서 유물 자체에 집중된 조명은 유물들을 제각기 아름다움을 발산하는 예술품으로 변모시킨다. 이처럼 인류학적, 역사학적 탈맥락화를 통해서만 문화들 사이의 평등과 소통이 가능하다는 메시지는 어디를 향해 있는 것일까. 혹 그것은 이주민의 후손들을 향해 식민 지배의 험난했던 과거를 잊고 프랑스가 제시하는 ‘아름다움의 평등’이라는 가치에 순응하는 방식으로 프랑스 사회에 통합할 것을 요구하는 메시지는 아닌가. 그것은‘아름다움의 평등’이라는 프랑스적 가치로 이 주민들을 다시‘문명화’하려는 시도로 볼 수는 없는가. 여기서 식민주의는 미학이라는 외투를 걸치고 다시 그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아닌가.

심미적 가치 추구로 재문명화 시도

식민주의의 과거와 결별하고 다른 사람의 역사와 문화의 가치를 인정하려는 시도의 어려움은 역사학 분야에서도 마찬가지다. 최근 활발하게 논의되는 ‘새로운 세계사’는 이전 세계사의 뿌리 깊은 유럽중심주의를 극복해 비-서구 역사의 의미와 가치를 인정하는 일종의 지구적 다문화주의를 그 목표로 내세운다. 그러나 새로운 세계사의 이상을 가로막는 최대의 장애물은 서구 역사학의 인식론 자체라는 사실이 부각되기 시작했다. 오늘날 보편화된 역사학은 서구 근대의 산물이며 이러한 서구적 지식 체계를 비서구의 경험에 적용하는 것이 과연 타당한가 하는 회의론이 세계화의 시대에 본격적으로 제기되기 시작한 것이다. 인도의 사상가 난디(Ashis Nandy)가 오늘날 필요한 것은 유럽중심주의를 벗어난 새로운 세계사와 같은 대안적 역사학이 아니라 역사학 자체의 대안이라 주장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식민주의와 유럽중심주의의 인식론적 폭력을 극복하고 세계의 다양한 역사와 문화의 가치를 그 자체의 맥락에서 인정할 수 있는 길이 어딘지 예상하기란 쉽지 않다. 새로운 세계사와 마찬가지로 서구의 포스트-식민박물관 프로젝트는 그와 같은 길에 도달하기 위해 먼저 수행해야 할 과제가 끈질긴 인식론적 자기 성찰임을 보여주는 몇 가지 예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김용우 한국교원대∙서양사
필자는 서강대에서 박사학위를 했다. 「식민의 기억, 점력의 기억」등의 논문과, 『프랑스의 열정: 공화국과 공화주의』(공저), 『서양의 지적 운동』등의 저서가 있다. 한국 교원대에 출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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