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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문명, 뿌리가 어디라고?
그리스 문명, 뿌리가 어디라고?
  • 오흥식 서강대 강사·서양고대사
  • 승인 2012.04.24 1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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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말하다_ 마틴 버낼 지음,『 블랙 아테나: 서양고전 문명의 아프리카·아시아적 뿌리』1·2권(오흥식 옮김, 소나무, 2006, 2012)

제1권『날조된 고대 그리스, 1785-1985』(소나무, 2006)
제2권『고고학 및 문헌 증거』(소나무, 2012)

그리스 신화에 따르면, 다나오스는 기원전 1511년에 이집트로부터 그리스에 도래해 아르고스에 자신의 왕조를 세웠고, 그의 후손들은 미케네, 티린스 등지로 영역을 넓힌다. 그러나 다나오스의 8대손 헤라클레스에 이르러 왕권이 이어지지 못하고 기원전 13세기 전반부터 펠롭스의 아들 아트레우스와 그 후손에게 지배권을 내어주기 시작했지만 기원전 1120년경‘헤라클레스 왕가의 복귀’(‘도리스족의 침입’이라고도 불린다) 이후 다시 펠로폰네소스 반도를, 특히 스파르타를 기원전 2세기까지 지배한다. 기원전 1세기 역사가 디오도로스에 따르면 그리스 신화(mythologia)는 ‘헤라클레스 왕가의 복귀’이전의 그리스 역사, 곧 미케네 문명 시기의 그리스 역사였다.

그리스 신화는 유럽 학계에서도 1800년경에 이르기까지 가장 오래된 그리스의 역사로 받아들여졌다. 영어로 된 대표적인 그리스 역사서는 윌리엄 미트퍼드(W. Mitford)가 저술한 방대한 분량의 The History of Greece(1784~1804)였는데, “근거 있는 몇몇 고대 그리스 전승은 그리스에 설립된 이집트 식민지들을 언급하고 있다. 그리스인의 민족적 자긍심을 거의 배려하지 않은 그 전승은 모든 알려진 역사와도 완벽하게 일치하고 있다. 관련 상황의 본질로 보아 그 전승은 의심할 바 없는 듯하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마틴 버낼(Martin Bernal)은 유대계 영국인으로1987년 서양고전문명에 대한 통념을 뒤흔든『블랙 아테나』1권을 출간하며 학문적 논쟁을 촉발했으며, 지금은 이 책의 4권을 집필하고 있다.
코넬대 교수 마틴 버낼(Martin Bernal, 1937~)은『Black Athena』1권(1987)에서 1800년경부터 그리스 신화가 허구의 이야기로 몰리게 된 유럽의 역사적 배경을 논하고 있다. 대내적으로 유럽은 1789년 프랑스 혁명의 영향을 겪게 된다. 1806년 예나 전투에서 프로이센 군대는 나폴레옹이 이끄는 프랑스군에게 패하자, 프로이센의 지배층은 만약 프랑스군이 재침한다면 이를 어떻게 저지할 것인지 고민한다. 프랑스를 바로 자신의 나라라고 생각하고
싸우는 병사들로 구성된 프랑스 군대를 기존의 그리스도교 국시로는 막을 수 없었고, 그렇다고 지배층이 귀족이라는 특권을 포기하고 프랑스 혁명의 이념을 스스로 받아들일 수는 없었던 것이다.

 

미케네·그리스 번영‘, 이집트 평화’로 가능

과거 종교개혁 시기에 루터가 신약성서를 라틴어 가톨릭 성서에서가 아니라 원전 그리스어 성서로부터 독일어로 번역하면서 독일어와 그리스어는 프로테스탄트의 언어라는 느낌을 독일인이 갖고 있었던 데다가, 루이 14세 이래 프랑스가 유럽의 정치와 외교에 큰 영향을 미치며 프랑스 문화와 언어가 주변국들에 침입하자 독일은 18세기에 신헬레니즘으로 이를 성공적으로 막아냈던 적이 있었다. 이제 프로이센 지배층에게 헬레니즘이 제3의 대안으로 다가왔다. 새로운 학문분과인 Altertumswissenschaft(고대학)는 이런 맥락에서 탄생했고, 1809년 교육부 장관 훔볼트가 강조한‘Bildung(교양교육)’의 중심을 차지하게 됐다.

그 당시 독일의 영향을 크게 받고 있었던 영국에서도 ‘Classics(고전학)’이라는 새로운 학과가 확립된다. 한편 대외적으로 유럽은 1800년을 전후해 아시아와 아프리카에 대해 제국주의 침입을 하고 있었으며, 이를 정당화하기 위해 인종주의를 내세운다. 인종주의와 국시로 대두한 헬레니즘이 결합되면서, 다나오스 같은 유색인종이 그리스 땅에 도래하여 식민왕조를 세우고 통치하는 동안에 오리엔트 문명이 그리스 땅에 뿌리를 내려 미케네 문명이 탄생된 것이라고 말하는 그리스 신화를 유럽의 학자들은 더 이상 역사로서 용인할 수 없게 된 것이라고 버낼은 주장한다.

『블랙 아테나』2권(1991)은 미케네 문명이 이집트, 페니키아로부터 식민화, 외교, 교역을 통해 심대한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그리스를 포함한 동지중해권전역의 고고학 증거와 문헌 증거를 제시하고 있다. 그는 기원전 18-16세기 하이집트를 점령했던 힉소스의 시대 전 기간을 통해 그리스는 힉소스에 의한 식민화를 포함하는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다고 보고 있다(다나오스도 힉소스다). 버낼에 따르면, 힉소스는 페니키아인과 유다인으로 구성되는 서부 셈족이 주류이지만 아나톨리아 동남부에 있었던 후루인(인도유럽어에 가까운 언어를 사용했다)도 포함돼 있었고 미케네의 수갱묘는 힉소스에 의해 조성된 것이었다.

청동기 시대 그리스 도기가 이집트를 포함한 동지중해권 거의 전역에 걸쳐 다량으로 발굴됐다. 버낼은 미케네 그리스의 교역과 번영이 신왕국 시대 ‘이집트의 평화(Pax Aegyptiaca)’하에 일어났다고 가정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주장한다. 투트모세 3세(1504~1450)에게 크레타(카프투)와 그리스 본토(하우 네부트)가‘생명의 숨결’을 얻기 위해 조공을 바쳤다. 아멘호테프 3세(1419~1381)의 葬祭殿에는 그리스 본토와 크레타의 도시명 목록이 새겨져 있는데, 그 목록에 포함된 미케네(상형문자 발음으로는‘무카누’)에서 1968년 아멘호테프 3세의 카르투쉬가 새겨진 채색도기 名板이 발굴됐다. 그 명판에 칠해진 유약에 포함된 납을 분석해보니 아테네産이었다. 저자는, 그 명판은 그리스로부터 수입한 납으로 이집트에서 제작했으며, 이집트는 그 대가로 그리스에 밀(小麥)을 수출했다며, 공식어인‘생명의 숨결’은 외국의 조공사절에게 파라오가 하사하는 정치적·정신적 의미만이 아니라 곡물 공급이라는 구체적인 의미를 지녔을 개연성이 크다고 주장한다.

청동기 시대의 역사를 다루고 있는데도 책 전체가 마치하나의 이야기인 양 유기적으로 잘 엮여져 있다는 것이 놀랍다. 이는 지리적으로는 동지중해권 전체, 시기적으로는 청동기 시대(3300-1100 BC) 전체를 꿰는 큰 흐름이 무엇인가를 버낼이 나름대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농업상의 풍요와 그 풍요를 기반으로 삼은 세련된 이집트 문명이 크레타, 키클라데스 제도, 그리스 본토를 포함하는 에게해 문명의 발생·유지·발전에 큰 부분을 차지했다는 인식이다.

유색인종이 통치한 미케네사 거부한 유럽

『블랙 아테나』2권이 출간된 이후 버낼에 대한 학계의 비판은 격렬해졌다. 『블랙 아테나』는 고대 그리스 문명의 기원을 새로운 각도에서 그리고 문헌학, 고고학, 언어학 등 여러 분야에 걸쳐 다루고 있기 때문에 적지 않은 결점이 있을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캘리포니아 주립대 교수인 스탠리 버스틴(Stanley M. Burstein)은 제2권에 대한 서평에서“『블랙 아테나』식(式)의 사료 읽기 하나만으로도 버낼은 모든 사람들의 감사를 받을 만하며, 또한 그리스 문명의 기원에 관한 의문을 몇 십 년 만에 처음으로 역사학의 화두로 제시했다는 점에서 감사를 받을 만하다”라고 평했다. 버스틴은 미케네 문명의 기원이 이집트와 레반트에 있다는 고대 그리스 저자들의 기록을 진지하게 다시 생각해야 한다는 점을 일깨운 것은 버낼의 큰 업적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버낼은 자신의 주장을 펼치기 위해 자신의 연구에 관련된 논문이나 책들을 거의 빠뜨리지 않고 연구사적 차원에서 다루고 있고, 여러 학자들의 견해를 비교하면서 자신의 주장을 부각시킨다. 고대 그리스사가 전공인 옮긴이는 고대 오리엔트 역사에 관한 다른 책을 참고하지 않고서 이 책만으로도 그의 논지를 개략적으로는 이해할 수 있었다. 『블랙 아테나』는 국내의 서양고대사 전공자들에게 미케네 문명을 새롭고도 폭넓은 시각에서 접근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할 것이다.

오흥식 서강대 강사·서양고대사

필자는 성균관대에서 박사학위를 했다. 주요 논문으로는「유럽중심주의의 극복과 사료로서의 그리스 신화」등이 있으며, 함께 지은 책『서양고대사강의』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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