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로 붐비는 카렐교. 그 밑으로 고요히 중세의 시간을 싣고 흔들리는 블타바 강물 위의 불빛. 나는 어느새 유럽 중세도시의 浮漂 같은 프라하城 그 겨드랑이 부근까지 걸어들어 가고 있다.
구한말 민영환의 사절단 멤버로 참여했던 중국어 역관 金得鍊은 1896년 뉴욕에서 전기등의 불야성을 목도하고「별과 달빛을 빼앗는다」라고 적었다. 아주까리 등불에 살던 그 시절의 사람들. 해외에 가서 처음 전등을 보았을 때의 충격은「불야성 안에 극락이 있다」라는 詩句에 물집처럼 잡혔는데. 지금 내게는 정반대다. 첨단 전기 불빛 속을 사는 인간이 어둑한 중세의 분위기에 넋이 나간다. 우뚝 솟은 성, 그리고 나무 가지가지마다 솟은 봄 꽃송이. 그 어디선가 내게 황급히 달려 나오는 중세의 가을이 보낸 무수한 꽃잎 편지들. 어둠 속에서 나는 그런 매개를 통해 잠시 잊혀진 존재의 회상(Andenken)에 빠진다.
모차르트 오페라 중의 걸작 돈 지오바니를 각색한 인형극 공연을 본 뒤 나는 일찍 잠을 청한다. 이튿날 바츨라프 광장⟶화약탑⟶구시가광장⟶구시청사/천문시계⟶클레멘티움⟶카렐교⟶네루도바거리를 거쳐, 페트르진공원 산꼭대기의 전망대로 간다. 시가지를 굽어본다. 빨간 지붕으로 치장된 중세 도시의 古風.
산을 걸어 내려와 프라하 성으로 간다. 성 내에는 구왕궁, 벨베르데, 성비투스대성당 등 볼거리로 가득하다. 그 가운데서도 나는 황금소로 22번지, 파랑색집 카프카의 작업실을 보고 싶었다. 그런데, 거기 카프카는 없다. 그의 서적 등을 판매하는 보통 가게일 뿐. 밀란 쿤데라가 말했듯 어차피 삶의 현실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으로 꽉 찬 것 아닌가.
‘거룩, 거룩, 거룩한 주여’라는 문구가 새겨진 예수 수난 십자가상 등 성경에 나오는 33인의 성인 조각상으로 난간을 치장한 카렐교. 나는 그곳을 다시 건너와 다리 입구 근처, 블타바 강 옆 카페에서 흑맥주 한잔을 마신다. 아 그런데, 생각해보니 프라하는 태양계 행성의 막내 冥王星(Pluto)이 퇴출된 곳 아닌가.
2006년 8월, 국제천문연맹(IAU)은 이곳에서 열린 총회에서 결의안을 통해 명왕성을 태양계 행성에서 퇴출시켰고, 이후 명왕성=플루토는 ‘격하, 추락’이라는 뜻으로, 나아가 ‘명왕성이 되다(plutoed)’는 ‘망했다, 바보됐다’는 등의 단어로 바뀌었다. 이런 명왕성의 스토리에서, 플루토가 되었을 프라하의 중세를 나는 겹쳐 읽고 있다. 천문학자들은 뉴턴의 역학에 따라 海王星 바깥의 어떤 별이 그것을 잡아당긴다고 생각했었지만. 이제 사라져간 별 명왕성을 잡아당기는 또 하나의 별은 뭘까. 그건 우리의 ‘기억’뿐. 프라하의 중세를 팽팽히 잡아당겨내는 기억. 중세라는 역사의 별은 이제 퇴락해갔으니, 내가 쳐다보는 저 성곽의 모습은 이미 옛날에 죽은 어느 시간의 깜빡였던 눈빛, 한때 초롱초롱했던 그 눈시울. 그렇다. 내 눈에 스쳐 지나 간 고딕・르네상스・바로크・로코코・아르누보와 같은 각종 양식들은 지나온 세월을 움켜 쥔 石棺 같다. 그런 虛想 앞에 한껏 발꿈치를 꼿꼿이 쳐든 프라하의 어린 꽃들.
요한 하위징아(Johan Huizinga, 1872-1945)는『중세의 가을』에서, 중세기 공동체의 생활의례를 ‘꿈’(=이상)과 ‘놀이’(=이상 실현의 프로그램과 규칙)의 실현 형태로 보았다. 예컨대 퇴계가 ‘투호’라는 놀이를 통해 엄숙함-진지함(敬)에 다가서고자 했듯이 말이다.
원래 禮는 ‘敬-異-嚴’을, 樂은 ‘愛-同-親’을 본질로 不一의 구조이면서도 不二의 조화를 지향한다. 聖祭처럼 ‘유희=놀이’와 ‘제사(종교의례)=진지함’은 결코 적대적이 아니고 하나라는 것. 그런데 진지함이 과격해져, 놀이를 잡아먹고 만다. 즉, 종교개혁의 열광, 전쟁은 적군과 아군. 흑과 백이라는 낡은 사고로 결국 조화를 허물고, 잿빛구름, 죽음의 그림자에 빨려들게 해서 결국 조용히 한 시대를 끝장냈다.
그럼, 중세는 근대의 봄인가? 하위징아는 말한다.「14,5세기의 중세문화는 일생의 마지막 시간을 살면서 마치 꽃이 활짝 피고 완전히 자란 나무처럼 가지가 휠 정도로 열매를 맺었다. 낡은 사고의 온갖 형태가 만연하여 살아있는 사상의 핵을 덮어 감싼다. 여기에서 하나의 풍요로운 문화가 시들고 죽음으로 경직된다.」(이희승맑시아 옮김, 『중세의 가을』, 529쪽 참조). 중세는 애석하게도 시들고 쇠퇴해간 ‘가을’이었다. 프라하의 봄꽃에서 나는 가을 열매를 직시한다. ‘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古都’, ‘알프스 북쪽에 있는 로마’라 불리는 프라하. 이런 고전적 칭호를 얻은 이유를 알 듯도 하다.
「시간이라는 형식은 삶을 갉아먹기도 하지만, 삶의 본질을 더욱 진지하게 거머쥐고 노려보며, 내 삶을 제대로 설계하게 닦달 해대는 것. 그래, 삶의 이력서엔 그런 땀 냄새만 가득하리라. 그럼 공간이란 또 뭔가. 내 삶의 좌표를 콕콕 아프게 짚어주며 위치 파악 제대로 하라 보채는 형식!」아르놀트 하우저의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중 베르그송과 프루스트 부분을 읽다가 여백에다 이렇게 적고서, 나는 프라하를 떠난다.
최재목 영남대ㆍ철학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