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3-29 04:15 (금)
[學而思] ‘붉은 악마’ 신드롬
[學而思] ‘붉은 악마’ 신드롬
  • 정해구 성공회대
  • 승인 2002.07.06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2002-07-06 12:13:19
한국정치를 전공하고 있는 나는 한국 유권자들의 정치의식과 관련, 그들을 다음과 같이 분류하고 그 특징을 설명해왔다.

우선 아마도 50대 이상의 유권자들이 대체적으로 여기에 속할 기성세대를 들 수 있다. 분단과 전쟁 그리고 수십 년 동안에 걸친 독재의 험한 역사 현실을 살아왔던 그들은 그 역사적 환경 속에서 그들 나름의 정치의식을 형성해온 바, 그것은 체제에 대한 저항보다는 인내를, 이상보다는 현실을 선택하지 않을 수 없었던 의식이라 할 수 있다. 즉 그들이 살아왔던 환경과 인생은 그들로 하여금 체제 순응적이고 현실 타협적인, 따라서 상대적으로 보수적인 정치의식을 지니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독재에 저항했던 민주화운동이 격렬하게 전개됐던 시대를 살아왔던 그 다음 세대는 그 시대적 환경 때문에 또 다른 정치의식을 지니게 됐다. 즉 30∼40대에 해당될 민주화운동세대는 분단과 전쟁의 반공국가 등장 과정을 통해 그리고 개발독재의 산업화 과정을 통해 구축된 우리사회의 기득권체제에 대해 강한 비판의식과 개혁의식을 지니고 있다. 그런 점에서 그들은 기성세대와는 달리 개혁적이고 진보적인 정치의식을 지닌 세대이다.

그러나 이같은 정치의식 역시 한 세대 이상 지속되지 못했다. 20대 주축의 젊은 세대의 정치의식은 민주화운동세대와의 그것과도 또 다르기 때문이다. 그들의 특징은 일단 정치로부터 자유롭다는 점이다. 부정적인 정치에 대해 순응하지 않을 수 없었던 기성세대와, 그 반대로 그것에 대해 저항하지 않을 수 없었던 민주화운동세대는 어떤 의미이든 정치적인 세대였다.

그러나 1987년 민주화 이행 이후에 자신의 주된 인생경험을 가졌던 이 젊은 세대는 점진적인 민주화 속에서 일단 덜 정치적일 수 있었던 것이다.

그 뿐 아니라, 그들은 정치에 대해 무관심하거나 이를 혐오하는 세대이기도 하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이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그 하나는 기성의 정치가 그들을 배제시키기 때문이다. 지역주의정치, 구태의연한 정치적 행태 등은 그렇지 않아도 정치로부터 자유스러운 이 세대를 정치로부터 더욱 멀어지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정치 이외의 다른 차원의 문제들이 이들의 관심을 더욱 끌어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는 어느 정도 발전한 경제력 수준을 바탕으로 그들은 소비와 문화에 더욱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특히 IMF 이후 급속하게 확산된 시장주의와 신자유주의적 경쟁의 강화는 그들로 하여금 그런 문제에 더욱 관심을 갖도록 만들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정치로부터 자유스러울 뿐만 아니라 이에 무관심하거나 이를 혐오하는 이들 젊은 세대가 한국축구의 월드컵 4강 진출에 열광하고 있다. 그 결과 놀랍게도 무려 수백만 명의 거리 응원단이 운집, 한국 주요 도시의 거리 곳곳을 온통 붉은 색으로 물들이고 있다. 그렇다면, 이 같은 ‘붉은 악마’ 신드롬은 정치적으로 어떤 의미를 지닌 것일까.

현상적으로 ‘붉은 악마’ 신드롬과 그들의 정치 참여는 역의 상관관계를 이루고 있는 듯하다. 지방자치선거에 대거 불참했던 그들이 거리 응원에는 폭발적으로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의 축구가 4강에 오르는 동안 그들이 보여주었던 폭발적인 응원은 그 이상을 말해주는 것은 아닐까. 즉 아전인수의 기대일지 모르지만, 정치가 그들의 관심을 끌 그 어떤 흥미와 성취를 조금이라도 보여준다면 그들의 폭발적인 정치참여 또한 불가능한 것도 아니라는 해석이 그것이다. 이미 2000년 총선의 ‘낙천낙선운동’이나 2002년 민주당의 국민경선 과정에서 ‘노사모’로 그 일면이 드러났던 젊은 세대의 정치참여는 그러한 가능성을 일정 시사해주는 것이기도 했다.

젊은 세대의 정치 불신이 최고조에 이른 바로 그 시점에서 역설적이게도 우리는 바로 그 참여의 폭발을 기대할 수 있는지도 모른다. 항상 사태의 뒷북만을 쳐왔던 사회과학과 정치학이 이러한 가능성을 기대하고 분석할 필요는 없는가.

<성공회대·정치학>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