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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보다 숲과 호수와 상상력의 밀도가 높은 북유럽
사람보다 숲과 호수와 상상력의 밀도가 높은 북유럽
  • 최재목 영남대 철학과 교수
  • 승인 2012.01.02 10:3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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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목의 <유랑·상상·인문학> ⑩ 코펜하겐, 오슬로, 스톡홀름, 발트해를 가로지르며

‘여행은 나에게 유익한 훈련이라 생각한다. 영혼은 미지의 것, 신기한 것을 보고, 끊임없이 실습한다.’ 몽테뉴는『수상록』에서 말한다. 그는 또 말한다. ‘고립된 장소에 있는 것이 오히려 나를 외부로 확장한다.’

내 마음의 구루(Guru)는 독서와 여행. 서로 입술을 맞대기 시작할 때, 초원은 온통 노란 꽃으로 뒤덮이고. 5월 말, 나는 네덜란드 스키폴공항에서 기차를 타고, 독일을 거쳐, 덴마크 코펜하겐으로 향한다. 노르웨이의 오슬로, 스웨덴의 스톡홀름을 거쳐, 발트 해를 건너, 핀란드 헬싱키까지 가야하는 긴 여행 길. 

기차를 타고 가면서 찍은 독일의 봄 풍경. 사진=최재목

코펜하겐 가는 길은 좀 까다롭고 흥미롭다. 독일의 함부르크에서 기차를 갈아타고 푸트가르덴에 도착하면, 기차는 분리돼 큰 배에 수납된다. 사람들은 모두 배의 갑판 위로 올라가 1시간가량 발트해를 건넌다. 배가 덴마크의 뢰드비에 닿으면, 다시 기차는 조립돼 코펜하겐 중앙역까지 달린다. 기차가 배를 타다니! 신기하다.

독일 푸트가르덴에서 기차를 싣고 발트해를 건너 독일서 덴마크 가는 배 갑판 위. 기차를 배에 실을 때 사람들은 모두 배의 갑판 위로 올라가 1시간 가량 대기해야한다. 배에는 면세점 등이 있다. 배가 덴마크의 뢰드비에 닿으면, 다시 기차는 조립돼 코펜하겐 중앙역까지 달린다. 사진=최재목

유럽의 북과 서를 연결하는 교통의 요지-코펜하겐. 106m의 시계탑이 있는 명소 시청사. 그 오른편엔 마른 얼굴의 안데르센 동상. 티볼리 공원 쪽을 동심어린 눈으로 멍하니 쳐다본다.  덴마크 오덴세 출생. 가난했으나 꿈과 상상을 놓지 않았던 안데르센. ‘여행이야말로 내 인생’이라 했다. 결혼도 定住도 하지 않은 70세의 삶,『인어공주』·『성냥팔이 소녀』등 수많은 동화를 남겼다. 이런 스토리마저 없었다면 참 썰렁했을 코펜하겐. 베네치아, 파리, 브뤼셀, 암스테르담처럼 시끌벅적함도 없이 그냥 고요히 저물어간다.

코펜하겐에서 하루를 묵고, 스웨덴을 통과해 노르웨이의 오슬로로 향한다. 틈틈 눈에 비치는 나무와 숲과 호수와 구름과 하늘. 꽃과 초원. 사람은 꼭꼭 숨고 자연의 밀도가 더 높다. 기차 여행은 더디다. 바깥에서 흐릿하게 스치는 숲의 그림자, 불안한 밤, 새벽에 만나는 들판의 고요와 침묵, 한낮에 마주치는 투명한 빛에 쏘인 몸집 큰 구름. 처음 접한 북유럽의 풍경에 눈을 붙였다 떴다, 千眼이 되어, 바깥을 빠짐없이 응시할 때, 풍광은 즉좌의 예술이고 믿음이다.

오슬로로 가는 도중에 찍은 노르웨이의 숲과 호수의 풍경. 사진=최재목

잠시 보르헤스 생각. 결혼에 실패한 뒤 그는 술과 담배 대신 도서관에 앉아『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을 아무데나 펼쳐, 관심 있는 것을 읽고 새긴다. 失明한 뒤 그는, 기억에 상상의 나래를 펴, 이미 습득한 지식을 내면의 소우주 내에서 거듭 반추했다. 내성은 天眼을 열어, 닫힌 세계 너머로 상통하고. 분절화된 개념 사이사이에 서로 인지적 유동성의 혈관이 생겨나, 미로정원은 원환구조를 이뤄 우로보르스 같은 法界圖가 된다. 뭣이든 ‘하나’는 ‘홀로이면서 온전한 전체’다. 홀로 있다는 생각을 삼가라! 어느 하나 나의 고마운 도반 아니랴. 세계가 한송이 꽃이라면 한권의 책이고 한 자락의 길이다.

뭉크의 <마돈나>(1894-1895) / 오슬로 <뭉크미술관> 소장
오슬로에 도착했다. 마찬가지로 조용하다. 뼈 틈새에서 새어나올 듯한 쓸쓸함. 노을마저 깔리면 에드바르드 뭉크의 「마돈나」 그 게슴츠레한 눈빛, 반쯤 벌린 입술처럼 우울·불안이 날 유혹할 듯. 모든 ‘표현’은 ‘빛’을 향한 몸짓만 같다. 뭉크의 「절규」에 보이는 붉고 검푸른 현기증도. “저녁 무렵 친구 둘과 길을 걷고 있을 때, 갑자기 하늘이 피처럼 붉게 물들었다. 피곤함을 느낀 나는 멈춰 서서 울타리에 기댔다. 검푸른 피요르드와 마을 위에는 핏빛으로 타오르는 구름이 드리워져 있었다. 친구들은 계속 걸어가고 있었지만, 나는 불안에 떨고 서 있었다.

그리고 끝없는 절규가 자연을 관통하는 것을 느꼈다”고 뭉크는 일기에 적었다. ‘열무 삼십 단을 이고/시장에 간 우리 엄마/안 오시네, 해는 시든 지 오래/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엄마 안 오시네. 배춧잎 같은 발소리 타박타박/안 들리네’(「엄마생각」)라던 기형도의 잔잔한 내면적 불안과 다른, 고막을 찢을 듯 외부에서 덮쳐오는 엄청난 공포.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북쪽에서 범람해오는 오로라의 발광, 그 자기장을 뭉크는 목도한 걸까.

오슬로 대학을 둘러본다. 문득 박노자 교수 생각이 난다. 전화를 할까 하다 시간이 없어 그냥 숙소로 돌아온다. 들리지 못했다는 인사는 나중 이메일로 전하고. 오슬로에서도 오래 머물지 못했다. 다시 기차로 남하.

이윽고 스웨덴의 스톡홀름으로 들어선다. 크리스티나여왕에게 초청되어 새벽 강의를 하다 폐렴으로 죽은 데카르트의 얼굴을 떠올리며, 저녁 무렵 헬싱키행 크루즈선 바이킹라인을 탄다. 하룻밤, 바다 위에서 보내야 한다. 햇살을 껴안고 시시각각 빛나다 고요히 저무는, 가물가물 검푸른 하늘. 뱃머리에 서니 잘 읽힌다. 형용사로만 붙들 수 있을『천자문』첫머리 ‘天地玄黃’의 ‘천’이.

헬싱키로 가는 바이킹라인의 모습과 검푸른 저녁 하늘. 다른 곳에서 보기 힘든 묘한 검푸른 색 하늘이 두드러진다. 사진=최재목

존재의 呈現은 검푸른 걸까. 끊임없이 허물어지는 투명 빙하 조각처럼, 그 알몸을 비쥬얼화할 수 없기에 노자는 夷·希·微라 은유했고. 말이 없다면 잡을 수 없기에 원효는 ‘獨淨·湛然’이라 했다. 중국어 ‘헌찡선(很精神)’이란 말처럼, 死句를 活句로 살려낼 언어는 시와 예술뿐인가. 북유럽은 셀마 라게를뢰프의『닐스의 이상한 여행』같은 상상력의 대붕들로 생기발랄하다.

최재목 영남대ㆍ철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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