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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스템없이 '무늬만 융합'…중장기적 관점에서 지원해야
시스템없이 '무늬만 융합'…중장기적 관점에서 지원해야
  • 신동희 성균관대 인터랙션사이언스학과 WCU교수
  • 승인 2011.11.08 10:0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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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CU 교수가 말하는 WCU의 문제점과 개선점

신동희 성균관대 인터랙션사이언스학과 WCU교수
최근 세계수준의 연구중심대학 육성사업(World Class University, 이하 WCU)에 대한 실효성 논란과 함께 그 지속여부에 대한 논의가 뜨겁다. WCU는 연구역량이 탁월한 해외학자를 국내 대학에 유치해 대학의 교육 및 연구력을 강화하고, 미래 국가 발전 핵심 분야의 연구를 촉진하고 인력을 양성하고자 교육과학기술부의 주도로 도입된 융복합 촉진 사업이다. 2009년부터 5년간 8천250억 원이 투입되는 대규모 사업으로 2013년 8월 종료를 앞두고 지속여부와 향후 대체 프로그램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다.

사실 WCU를 기획하는 시점인 2008년부터 WCU 사업에 대한 비난과 논란이 일어왔다. 종료 2년을 남겨둔 요즘 그 비난의 목소리가 드높아 지고 폐지와 지속을 둘러싼 논란이 한창이다. 새로운 학과를 신설하는 유형1사업의 경우 국내 23개 프로그램에서 입학정원조차 채우지 못하는 미달학과가 속출하고 있다.

국내 참여교수들은 형식적으로만 소속을 옮겼을 뿐 실제로는 원소속학과에서 활동을 하며 융합학과에 참여는 미미한 수준이다. 또한 해외참여교수는 WCU학과에 대한 실제 기여부분을 차치하고 아예 최소 국내 체류기간을 지키지 않는 등 규정미달 사례가 발생하면서 실효성에 대한 논란이 증폭되고 있다. 급기야 올해 국감에서 WCU 사업 예산이 30%이상 삭감됐다. 항간에는 귀한 국민의 세금을 들여 외국학자들의 지갑만 불리고 있고 “WCU가 외국학자들의 밥”이라는 말까지 나오고 있다.

WCU가 이런 지경에 까지 오게 된 것에는 정부, 대학, 해당 사업단 모두 비난에서 자유롭지 않다. 교과부는 8천억 원 이상 규모의 거대 프로그램을 계획 실행하며 그러한 일련의 부작용이나 시행착오를 예상하고 대비책을 마련하는 등 철저한 준비를 했어야만 했다. 애초 2009년 교과부가 여러 반대에도 불구하고 하향적(top-down)인 강한 추진력으로 WCU 사업을 시행한 배경에는 융합에 대한 학문적ㆍ사회적ㆍ산업적 기반이 취약한 한국적 상황에서 융합학문이 자생적으로 생존하기 어렵다는 전제가 깔려있다.

그런 애초의 판단에서 정부가 간과한 점은 사업의 성공여부를 단기간의 성과나 결과물로 판단하려고 하는 점이다. 미국이나 유럽에서는 새로운 융합학문들이 대학이나 민간연구소, 기업들의 주도로 상향적 (bottom-up)으로 생겨나고 정부가 후속적으로 지원하는 방식으로 수십 년에 걸친 시행착오 끝에 현재의 성과를 이루고 있다. 이렇게 수십 년에 걸쳐 확립된 융합학문을 한국에서는 불과 4~5년 안에 가시적 성과를 평가하고 있다.

WCU 사업이 부진한 이유 중 하나로 WCU 선정대학들도 그 책임에서 자유롭지 않다. 사업계획서에 대학 총장이 책임을 지겠다는 의지표명을 하도록 했지만, 현재까지 대학당국의 지원은 거의 전무하다. WCU 사업단은 지원받는 예산이 있다는 이유로 대학당국의 지원에서 배제돼 있고, 학과와 학생은 무관심속에 방목되고 있다. 과거 사례를 보면, 한국의 대학들은 정부의 대형국책사업에, 대학의 역량이나 인프라, 성과 달성 가능성 등은 뒷전이고 우선은 사업비를 따 놓고 보자는 식이었다.

그러나 일단 사업이 선정되고 난 이후부터는 사업단이 알아서 해보라는 식으로 방치된다. 결국 대학 총장이 바뀌거나 정부 재정 지원이 중단되면 사업은 흐지부지 사라진 사례가 수도 없이 많다.

WCU 사업의 만족스럽지 않은 성과의 이면에는, 융합학문이 정착되기 힘든 우리사회의 닫힌 구조가 드리워져 있다. 학문적으로는 학과간 구분, 학제간 골이 너무 깊어 새로운 학문이 진입하기에 큰 장벽이 되고 있다. 경제적으로는 범위의 경제(economy of scope)가 다양하지 않은 우리의 경제구조에서는 융합학문 인력을 수용할 산업적 직장의 폭이 넓지 않다는 것도 걸림돌이다. 또한 사회적으로는 융합학문을 하나의 이질적 변이로 바라보는 차가운 사회적 시선이 융합학문 정착에 큰 장애요소가 되고 있다.

필자는 2009년 WCU출범과 함께, 해외학자의 신분으로 초빙됐지만, 국내융합학문을 위해 국내로 영구 귀국해 학과에서 전임교수로 일하고 있다. 지난 3년간 WCU 융합학과의 교육현장에서 부대끼며 체득한 것은 국내 융합학과에는 지속 발전 가능한 체계나 시스템이 매우 미약하다는 것이다. 융합이라는 것이 대학의 구조조정이나 학과통폐합의 좋은 구실로서 악용되고 있는 현실에서 융합학과가 학과 명칭만 바뀌고 배우는 커리큘럼은 비슷하거나 별 차이 없는 ‘무늬만 융합학과’가 속출하는 것이다.

WCU 융합학문이 안정적으로 정착하고 산업적ㆍ사회적으로 영향력 있는 결과를 내기 위해서는 외형적ㆍ형식적 융합을 통해 무리한 속도를 내기 보다는, 교육커리큘럼과 우수한 전임교원 확보 등 실질적 내실을 다져야 한다. 현재까지 WCU 융합학과의 90%이상의 교수가 겸임교수이거나 이름만 걸려있는 교수들이다. 융합학과가 정상적으로 운영되기 위해서는 이런 겸임교수가 아닌 학과에 전념할 우수한 전임교수 확보가 필수적이다. 창의성 있는 교육프로그램과 전임교수-학생간 밀착지도의 과정을 통해 장기적으로는 안정적 교육시스템과 전반적 산업ㆍ사회 체계가 갖추어져야 한다.

물론 이러한 작업이 짧은 시간에 완성되지 않고 중장기적 관점의 투자와 노력이 요구되는 것은 두말할 나위 없다. 세계 수준의 융합학문은 결코 단위대학이나 소규모 연구팀의 노력만으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정부와 대학은 진정으로 세계 수준의 대학 또는 적어도 특정 분야에서만큼은 세계 최고를 만들겠다는 의지를 갖고 중장기적인 관점에서 지원을 해야 한다. 융합학문에 참여하는 개별 학자들도, 해당 융합분야에서 세계수준을 한 번 만들어보자는 뚜렷한 비전과 목표의식, 열정과 자발적인 헌신을 기울여야 한다. 약 2년을 남기고 있는 WCU 사업의 성패여부는 앞으로의 정부, 대학, 학자 모두의 적극적 협력에 달려있다.

신동희 성균관대ㆍ인터랙션 사이언스학과 WCU교수
성균관대에서 신문방송학 학사학위를 받고 미국 시라큐스대에서 석사와 박사를 했다. 2004년부터 2009년까지 미국 펜주립대의 융합프로그램(Information Sciences and Technology)에서 교수로 지내다 교과부 WCU프로그램의 해외학자로 초빙돼 영구 귀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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