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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적 사유로 들어서는 약간의 연습
유럽적 사유로 들어서는 약간의 연습
  • 최재목 영남대 교수
  • 승인 2011.10.31 16:1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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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목의 유랑·상상·인문학⑤ ‘일몰의 포플러 가로수’와 해석기하학의 指紋

최재목,「흐린 날의 운하 풍경」. 흐린 날, 라이덴시 외곽을 흐르는 운하를 바라보며 그린 그림.
비 찔끔대던 어느 날 오후. 우산을 받쳐 들고, 포플러 가로수 길을 지나, 라이덴시 외곽의 너른 운하를 보러간 적이 있다. 나는 길을 걸으며, 장 마르크 드루앵이 지은『철학자들의 식물도감』(김성희 옮김, 알마, 2011)의 한 구절을 음미했다. “생각하고 움직이는 동물인 인간의 입장에서 보기에 아무런 감각 없이 그저 바람이나 물결가는대로 흔들리는 것처럼 보이는 식물은 익숙하면서도 낯선 모순적인 존재다. 늘 주위에 배경처럼 있기에 익숙하면서도, 막상 주인공의 자리에 놓고 보면 낯설게 느껴진다.”(11쪽)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 한 구절처럼, 내 기억에서 정작 낯설기만 한 포플러. 그런데, 이것이 내 기억을 거머쥐고 있었다니! 그때, 문득 솟구쳤던 내 活句. “포플러 길을 따라 걷는다/후두둑 비가 내리는 길은/꼭 X축 Y축의 좌표 같다/층층의 나뭇잎을 수없이/걸어서 오른 저 물방울들/點點 찍혀 포물선이 되고/검푸른 구름을 덧칠한다/일렬 수직 포플러 나무와/수평의 길이 만든 직각 속/얼말까 내린 비의 총량은」(「망각의 기하학」)

빈센트, 「일몰의 포플러 가로수」(1884), 오테를로, 크뢸러 뮐러 국립미술관 소장
속성수로 들여와 우리나라 시골 풍경을 탄생시켰던 포플러 가로수 길. 뭣도 모르고 친숙해왔던, 기획 속에 이식된 ‘歐美의 樹種’들. 기억의 편린은 꾹꾹 눌러 쓴 초등학생의 연필자국처럼 선명한데. 네덜란드 누에넨 시기, 빈센트의 그림「일몰의 포플러 가로수」와「가을의 포플러 가로수」에서 또 그것을 만나본다. 일몰의 지평을 배경으로, 일직선의 포플러 나무가 줄지어 서 있고, 그 사이에 난 길을, 누군가 어디를 향해, 고개를 숙이고 묵묵히, 뚜벅뚜벅 걸어가고 있다.

“나는 도보로 그대, 무덤 곁으로 간다/무덤은 멀다 노을 아래로/노을을 머리에 이고/타박타박 낙타처럼 걸어간다”고 한 김영태의 시(「김수영을 추모하는 저녁 미사곡」)처럼. 꾸부정하게 허리를 굽히고, X축 Y축이 된 길 가의 가로수, 그 좌표 같은 나무 사이로 포물선처럼 둥그렇게 휜 허리의 한 사람이 걷고 있다. 어김없이 빛나는 노을. 걸음의 힘이 실렸던 엄지발가락과 뒤꿈치는 길을 꾹꾹 누르며, ‘오늘도 걷는다 마는 정처 없는 이발길’이 된다. 우리는 그렇게 늘 어딘가를 향해 걸어가고 있다.“내가 가는 곳은 어디인가./ (중략)/이곳은 처음 지나는 벌판과 황혼,/ 그 입 속에 악착같이 매달린 검은 잎이 나는 두렵다.”는 기형도의 시(「입속의 검은 잎」)처럼, 불안한 길을, 포플러 나뭇잎 소리를 들으며 걷는 사람들.

호헤 벨루베의「크뢸러 뮐러 미술관」모습.   자전거가 서 있는 뒤편으로, 네덜란드에서 가장 큰 국립공원인 더 호헤 벨루베의「크뢸러 뮐러 미술관」이 보인다.  사진=최재목

빈센트의 그림은 그랬다. 길 가에 줄지어 선, 가로수에 매달려 팔랑대는 나뭇잎처럼, 우리는 황혼을 배경 삼아, 벌판 위의 길에 발바닥으로 매달려, 흔들거리며, 검은 점 하나로 좌표를 이동해 가고 있다. 이것은 마치 삼각측량(triangulation)법을, 그림 속에 박아 넣은 듯한 착각. 아니면, (출처가 의심스럽긴 하지만)천장을 기어 다니는 파리를 보고 파리의 경로는 인접한 두 벽으로부터 파리까지의 거리를 연결시키는 관계만 알면 나타낼 수 있다는 생각이 스쳐서 해석기하학에 대한 착상이 떠올랐다는 데카르트의 일화(이종우, 『기하학의 역사적 배경과 발달』169쪽)를 떠올린다.

말이 나온 김에 좀 더 소개해 둔다. 군대생활을 하고 있던 어느 날 밤(1619년 11월 10일), 데카르트는, 세 가지 꿈을 꾸었단다. 첫째, 악마의 바람 때문에 교회(또는 학교)의 무풍지대에서 그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는 제 삼자 쪽으로 날아가는 꿈. 둘째, 미신에 이끌리지 않고 ‘과학의 눈’으로 무서운 폭풍을 노려보며, 그 정체를 파악하자, 그에게 아무런 피해를 끼치지 못함을 깨닫는 꿈. 셋째,「어떤 길을 찾아가야 할 것인가?」로 시작하는 아우소니우스(Ausonius, 310-395?)의 시를 낭독하는 꿈. 데카르트는 이런 꿈들이 그의 인생의 목표를 명확히 해 주고 ‘경이로운 과학’과 ‘놀라운 발견’(해석기하학적으로 보임)을 밝힐 결심을 하게 해주었단다. 18년 뒤, 비로소 그의 착상 일부를, 네덜란드에서 쓴『방법서설』(이종우,168~169쪽)에 상술했다.

일몰, 석양의 ‘빛’, 포플러 가로수 길의 ‘기하학’적 연상은 내 인지적 유동성을 꿈틀대게 하 는 ‘通’의 ‘路’다. 결국 빈센트의 그림에서 내 생각은 네덜란드의 화가 피트 몬드리안(1872~1944)으로 진행되고 있다. 우연이 아니다.

수평선과 수직선, 정사각형과 직사각형의 순수기하학적 형태의 화면 구성. 질서, 비율, 균형의 미. 이런 것들은 사실 네덜란드적 풍경의 指紋이리라. 몬드리안에서 보는 기하학적 미술은, 네덜란드의 건축으로도 면면 이어지는 것이다. 그렇지, 한참 기억을 더듬어 보면, 플라톤은 ‘신은 기하학적으로 사고한다’고 말했고, 그의 아카데미아 입구에는 ‘기하학을 모르는 자는 들어오지 마시오’라고 적혀 있었다.

나는 지금 유럽적 사유로 들어서는 약간의 연습을 하고 있다. 빈센트의「일몰의 포플러 가로수」에서 데카르트의 해석기하학적 연상으로.

최재목 영남대 철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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