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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 근대학문은 파괴적”(최제우) … “민족 생존 위해 경쟁·근대과학기술 필요”(박은식)
“서구 근대학문은 파괴적”(최제우) … “민족 생존 위해 경쟁·근대과학기술 필요”(박은식)
  • 최익현 기자
  • 승인 2011.10.10 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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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종원 베이징대 교수, 최제우와 박은식의 유교·근대문명 태도 비교분석

'유교'를 새롭게 이해하려는 학계 시도가 다양하게 전개되고 있다. 김상준 경희대 교수는 일전에 출간한 『맹자의 땀 성왕의 피』(아카넷, 2011.7)를 통해 현대적 해석을 시도해 화제가 됐다. 그의 이 책은 최근 '2011년 성균관 유교학술원 유교저술상'에 선정되기도 했다. 최근 발간된 경북대 퇴계학연구소(소장 김문기·경북대 국어교육과)의 <退溪學과 儒敎文化>(제49호, 2011.8) 역시 최근 유교 연구의 일단을 엿볼 수 있는 좋은 지표다.

<退溪學과 儒敎文化>(제49호, 2011.8)

이 가운데 황종원 북경대 교수(한국어문화학과)의 논문 「최제우와 박은식의 유교개혁 방향, 평등관, 서구 근대문명에 대한 태도」는 격동기의 문제적 인물이 자신을 에워싼 전통의 양날을 어떻게 수용하고, 이를 넘어서려 했는지, 이 가운데 유교라는 측거점을 어떤 방식으로 활용했는지를 분석한 흥미로운 작업이다.

황 교수의 착안점은 '최제우와 박은식은 모두 유교교육을 받고 자라났으나 근대라는 완전히 새로운 역사적 전환기에 직면해 유교의 개혁방향을 모색했다'는 점이다. 그는 이들에 대해 "정통 주자학에서 크게 탈피됐을지언정 두 사람은 여전히 유교에 강한 애착을 갖고 있었고, 그 求新의 방향이 종교화라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유교의 정교화에 대한 두 사람의 구체적인 생각은 여러모로 달랐다"라고 평가한다.

최제우와 박은식. 근대 격동기를 살았던 이들에게 유교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그리고 그들이 그려낸 근대의 방향은 어떤 것이었을까. 황 교수가 추적한 문제의식이다. 왜 이들이었을까. "조선의 지식인들이 맞닥뜨려야 했던 근대의 이중성을 감지한 이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라고 지적하면서, 황 교수는 "전통 유교와 근대 사이에서 양자택일의 극단을 넘어 비교적 균형 잡힌 시각을 보이며 적절히 취사선택을 하려 했던 또 다른 흐름"인 '유교의 틀 안팎에서 이뤄진 유교 개혁운동'에 주목했다.

그는 두 가지 새로운 흐름 즉, 하나는 유교의 틀 안에서 박은식-이승희-이병헌으로 어어진 개혁운동에, 다른 하나는 유교의 틀 밖에서 최제우와 최시형에 의해 진행된 보다 급진적인 혁신운동에 눈을 돌리면서 최제우와 박은식을 호명했다.  

사실 기존 논의들에서는 박은식 혹은 최제우와 유학의 관계가 각각 독립적으로 연구됐다. 황 교수가 이들을 하나의 쌍으로 묶어 비교 분석한 데는 그 스스로 밝혔듯, 이 두 인물은 공통점과 차별점을 동시에 내포하고 있다는 사상사적 위상이 작용한다.

최제우, 시천주에 기반둔 평등사상 지향

우선 최제우는 전통 유교로는 '다시 개벽'이 되는 완전히 새로운 시대에 적응할 수 없다고 생각해 유교 밖에서 새로운 유교와 아주 가까운 새로운 종교를 창도했다. 반면, 박은식은 주자학이나 순자학적 전통만이 근대사회에 맞지 않을 뿐, 양명학이나 맹자사상적은 전통은 새로운 시대에도 타당하고 유효하기에 유교 안에서 그 중심을 양명학으로 전환하는 것만으로도 유교가 인민들의 정신생활에 중추적인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또 최제우의 경우 하늘님과 조우라는 종교적 체험을 계기로 전통유교에서는 상대적으로 박약한 초월자에 대한 믿음의 요소를 강화해 나간 반면, 박은식의 경우에는 그런 신비스런 종교체험 없이 애국계몽이라는 당시 시대적 과제를 수행할 효과적 수단으로 유교의 종교화를 선택했다.

그밖에 최제우는 마음 안에 내재하는 천주를 신령이라 한 것 외에 마음 밖에서 기화하는 생명운동의 세계도 하늘님의 기화라 해 이를 신성시한 반면, 박은식은 선천적으로 내재하는 양지의 활동성을 강조하면서도 외물을 식산을 위한 과학적 탐구의 대상과 양지의 발현 대상으로 분열시킴으로써, 대부분 이 둘을 따로 논할 뿐, 양자의 긴장관계에 대해서는 깊이 있게 사유하지 못했다.

종교적 혹은 도덕적 신념이 사회적 평등관의 형성 및 서구 물질문명에 대한 태도에 미친 영향도 미세한 차별점을 드러낸다. 두 인물 모두 전통사회의 신분적 질서에 반대하고 평등사상을 고취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런데 최제우의 경우에는 사회적 평등 관념이 서양 근대 정치사상의 직접적 영향으로 형성된 것이 아니라, '시천주'의 천부인권사상이나 반인종주의적 평등사상으로부터 영향을 받았으되, 그것을 맹자의 민본주의나 처지가 공평하게 만물을 생육한다는 전통유교 관념과 결합시킨다는 점에서 차이를 보이고 있다.

더불어 최제우의 평등관에서 강조되는 것은 평등한 지위를 얻기 위한 자기 권리의 주장이나 투쟁이라기보다는 각자 몸 안에 하늘님을 모신 타자에 대한 관심과 존중, 경외인 데 비해, 박은식에게서는 근대 정치·사회적 의미를 지닌 권리, 특히 약소민족, 약소국의 평등한 권리라는 측면과 타자를 위하는 마음의 발현, 즉 양지의 실현이 동시에 강조되는 점도 차이다. 황 교수는 "이러한 차이는 당시 조선이 처한 상황에 대한 위기의식의 정도 차이를 반영하는 것이자, 그 위기의식의 심화에 따른 자기보호 본능 표출의 차이를 반영하는 것"이라고 읽어낸다.

박은식, “양명학·맹자사상은 근대에도 유효”

또한 이 점은 서구 물질문명에 대해 두 인물이 보인 극명한 태도의 차이를 야기하기도 한다. 최제우는 동학도가 신앙하는 대상이 천주교와 같은 천주라고 천명하는 전제 하에, 서구의 근대학문은 천주를 위하는 점은 하나도 없는, 인류를 인위적, 파괴적 상태로 이끄는 학문이라 규정하며, 이와는 반대로 동학은 무위의 원칙을 따르는, 인류를 평화로운 문명으로 이끌어갈 학문이라 자신한다.

반면 박은식은 망국의 임박이라는 현실 앞에서 약소민족의 활로를 모색한다는 측면에서 사회진화론을 수용한다. 그러다 망국 이후에는 사회진화론과 서구의 근대과학기술이 지닌 파괴적 성격에 대해 때로는 날카롭게 비판하기도 하고 현실에 대한 양지의 감찰관 같은 역할을 역설하기도 하지만, 여전히 경쟁과 식산이 민족이 독립될 수 있는 길이라는 점도 강조한다.

양지의 전면적 실현으로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이 평화롭게 공존하는 대동사회를 이룩해야 한다는 이상, 그리고 그 기준에 입각해 서구 근대문명의 파괴성을 비판하는 일면은 최제우와 일맥상통하지만, 민족이 생존하기 위해 경쟁과 근대 과학기술의 도입을 적극 주장하는 일면은 최제우의 그것과는 아주 다르다는 게 황 교수의 결론이다.

최익현 기자 bukhak64@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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