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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로 오면서 은일 상징하기보다 장식적 경향으로 흘러
근대로 오면서 은일 상징하기보다 장식적 경향으로 흘러
  • 최익현 기자
  • 승인 2011.10.10 1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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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화 그림은 어떻게 변해왔을까

옛 선비들은 이 국화를 어째서 자주 그림에 그려 넣었을까. 국화가‘사군자’의 소재이기도 한 까닭은 무엇일까. 이선옥 전남대 호남학연구원 HK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국화는 매화나 대나무처럼 자태를 뽐내는 잎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선비들이 국화를 좋아한 것은 소박한 모습이지만 가을 서리를 이겨내는 의연함과 은은한 향취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그는 올해 초‘사군자’를 직접 주제로 내세워 매, 난, 국, 죽의 문화사를 조명한『사군자-매란국죽으로 피어난 선비의 마음』(돌베개, 2011.1)을 출간한 바 있다. 이 교수의 문제의식은 매란국죽이 어떻게‘四君子’로 불릴게 됐느냐에 있었다. “사군자는‘君子’라는 최고의 수식어가 붙음으로써 강한 가지치향적 상징을 지닌 대상이 됐다”라고 그는 설명한다. 그렇다면, 이 국화는 어떻게 조선의 그림 속에서 변화돼 왔을까 궁금해진다. 상징적 의미가 그렇다면, 그림의 양식적 변화는 어떻게 시대에 따라 진행됐을까. 그의 시선은 이 의문을 따라가고 있다.

이 교수에 의하면, 현재 조선 중기 이전의 국화도는 남아 있는 것이 없다고 한다. 그러나 그림은 남아 있지 않지만 국화도에 관한 기록은 더 이른 시기부터 발견할 수 있다고 한다. 고려말 문인 이색(1328~1396)의 시 중「靑晩對菊」의 한 구절은 이색이 국화를 감상했을 뿐 아니라 국화 그림을 그렸을 가능성도 보여 준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알려진‘국화 그림에 대한 제화시’로 가장 이른 예는 조선 초기 성현(1439~1504)의『虛白堂集』에 실린「題굃궇所藏彩畵圖八首」다. 모란, 작약, 규화 등 여덟 가지 화초와 함께 그린 국화 그림에 대해서도 읊고 있다. 성현은 국화를 의인화한「菊翁說」에서도 국화를“그윽하고 아취 있고, 담박하며, 깨끗하고 자연스러워 홀로 빼어나다(幽雅淡白, 潔然獨秀)”라고 말해, 국화에 대한 각별한 애호를 보여준 바 있다.

이 교수는‘국화’가 그림 속으로 스며든 양식적 전개를 15~17세기, 18세기, 19세기로 나눠 고찰했다. 15~17세기 국화 그림은 소박한 기품을 담고 있으며, 대표적으로 홍진구의 묵국도와 윤두서의 국화 그림을 꼽을 수 있다. 그는“시기를 가늠할 수 있는 것은 홍진구의「묵국」한 점에 불과하다”라고 지적한다.

이후 18세기 국화는 완상 문화의 발달에 힘입은 묵국도의 형태로 발전한다. 정원을 가꾸고 회훼를 기르는 원예 문화가 발달해 각종 국화를 기교 있게 기르는 취미가 만연한 시기였다. 화보풍의 묵국화, 정조의 국화도, 이인상의 병국도, 유신의 국화 화분을 꼽을 수 있다. 이 시기 작품이 증가한 배경에는 손쉽게 보고 그릴 수 있는 각종 화보가 제작되고 전래돼 유포된 측면이 있다. 국화 종류가 많아진 만큼 그림 속의 국화도 꽃잎이 길고 짧고, 가늘기도 도톰하기도 하면서 국화도도 다채롭게 전개됐다.

19세기는 조선시대 회화 전반에 많은 변화가 있었던 시기이다. 이 시기 국화 그림은 시대적 조류와 맞물려 분방한 필치와 장식적 경향까지 지니게 된다. 개성 있는 필치의 국화 그림들이 등장하기 시작하며, 품종이 다양해진 그림 속 국화를 만날 수 있다. 鶴山윤제홍, 조희룡과 허련, 그리고 장승업과 근대화가들의 국화도가 이에 해당한다. 이후 19세기 국화도는 근대로 이어지면서 한 화면에 사군자를 함께 그리거나 기명절지에 포함돼 그려졌다. 군자나 은일을 상징하던 모습보다는 장식적인 경향을 보이게 된다.

홍진구의 묵국도 : 17세기에 활동했던 홍진구의 국화 그림이 조선시대 국화 그림 중에서는 이른 시기에 해당한다. 국화 꽃잎을 그린 구륵법과 달리 꽃잎을 몰골로 그린 후 진한 먹으로 선을 하나 덧그려 꽃잎의 맥이 선명한 나리꽃의 특징을 나타내었다. 텅 빈 듯한 배경에는 가을날의 편안함과 따스한 햇살이 번져 있는 듯하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아무렇게나 늘어진 듯한 풀잎 몇 가닥이 하단의 허전함을 채워 주고 있다. 다른 화목과 달리 이 작품은 담채를 가한 점에서 독특하다.  「묵국도」, 홍진구, 조선 17세기, 종이에 수묵담채, 32.6×37.6cm, 간송미술관)

화보풍의 묵국화 : 18세기 문인화가 강세황은 사군자 작품을 여럿 남기고 있다. 강세황은 대나무와 국화, 돌을‘세 가지 유익한 벗’이라 했는데, 이 셋을 함께 그린 그림이 바로「菊竹石圖」이다. 강세황은 국화를 그릴 때 대체로 위가 평평하면서 납작한 소국을 많이 그렸지만, 그림마다 조금씩 다른 꽃 모양을 그려 다양한 품종의 국화를 두루 표현했다.

윤제홍의 난국괴석도 : 정치적으로는 불운한 일생을 보낸 문인 윤제홍의 이 작품은 지두법으로 그린 듯 독특한 필법을 보이는데, 그의 개성이 유감없이 발휘된 작품이다. 괴석과 국화도 독특하지만 오른편에서 쓰기 시작해 왼편으로 연결되게 한 화제 또한 파격적이다. 그는 이렇게 노래했다. “윤경도 제홍은 읊노라. 난초는 빼어나고 국화는 향기롭네. 가인을 그리워함이여, 능히 잊지 못하리.”「난국괴석도」, 윤제홍, 조선 18세기, 종이에 수묵, 24.5×38cm, 개인

장승업과 근대화가들의 국화도 : 장승업의「국석도」도 한 송이 큰 국화를 강조해 바위와 함께 그린 작품이다.근대기 문인 화가 김용진의「국화도」는 긴 화면을 효과적으로 운용해 국화의 특징을 잘 표현한 작품이다. 제문에 그의 나이 65세 때인 1942년 동경에 가는 屈大人에게 송별의 선물로 그려 준 그림이라 적었다. 서화에 두루 능해 해서와 예서를 주로 썼으며, 그림은 청말 海波화가인 오창석의 문인화법을 이어받아 사군자와 문인화를 즐겨 그린 인물이다.  「국화도」, 김용진, 1942년, 종이에 수묵 담채, 108.5×34.5cm, 학고재)

최익현 기자 bukhak64@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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