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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식 조어 ‘靑苔錢’ 바로잡아야
일본식 조어 ‘靑苔錢’ 바로잡아야
  • 박광순 전남대 명예교수·경제학
  • 승인 2011.09.19 1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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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광순 전남대 명예교수·경제학
차를 뜻하는 어휘는 茶, 茗, 檟, 蔎, 荈 등 다양하다. 그 종류 또한 많아 그 가지 수가 와인의 종류를 능가한다는 사람도 없지 않다. 가장 통상적인 분류는 잎차(혹은 散茶)와 떡차(錢茶, 團茶, 차떡 등)라 할 수 있다. 우리나라 잎차의 시배지가 지리산 기슭 하동 일원이라면, 단차의 주산지는 가지산에서 월출산-만덕산-두륜산으로 이어지는 호남정맥의 남단이 아닌가 한다.

특히 전남 장흥은 호남정맥의 주봉이라 할 가지산 아래 보림사가 자리하고 있는 유서 깊은 고장이다. 보림사는 본래 보조체징이 구산선문의 하나로 개창한 선찰인데, 체징은 곫居선사의 제자요 염거스님은 道義스님의 제자다. 도의는 784년 입당해 37년간 당에 머물면서 백장청규로 유명한 百丈懷海의 법맥을 이은 분이다. 그러니 도의의 다력이 깊었으며, 그것이 체징에게로 이어졌으리라는 사실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도의스님이 당나라에 머물고 있을 시기, 당의 차는 단차(떡차)가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다시 말하면 보림사에 처음 들어온 차는 단차, 즉 떡차였다. 보림사를 우리나라 떡차의 발원지로 지목하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보림사의 차문화는 쇠퇴해 대나무 사이에 차나무만 무성할 뿐이었다. 요행이 강진에 유배 중이던 茶山이 이곳에 들러 九蒸九曝의 제법으로 떡차를 다시 만들어 승려들에게 가르치고 이어서 草衣가 寶林白茅라는 이름으로 그를 계승해 조선조 말까지 떡차의 전통을 지켰으나, 일제 강점기에 靑苔錢이라는 괴상한 이름으로 와전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필자가 여기에 제기하고자 하는 문제는 바로 ‘청태전’이라는 명칭이다. 청태전이라는 이름은 과문 탓인지는 모르겠으나 어느 다서에도 보이지 않으며, 그렇다고 민간에 전승돼 온 적도 없다. 바꿔 말하면 ‘청태전’은 일본사람, 구체적으론 당시 조선총독부 修史官이던 이나바 이와기찌의 조어라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지면 때문에 여기에선 상론하지 못함이 유감이나 그 개요만을 간추려 보면 아래와 같다.

일제강점기에 장흥의 떡차(錢茶)를 처음 일본에 알린 사람은 나가오 만죠였다. 도자기와 차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던 그는 1925년 1월, 강진 청자도요지를 답사하고 장흥으로 넘어가던 도중, 장흥군 관산면 죽천리 장터에서 꾸러미에 낀 돈차를 촌부가 팔고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 몇 군데를 조사한 다음 귀국해서「조선 전차의 고찰」(『仁和寺御室御物目錄の陶瓷』)이라는 소논문을 발표한다. 이 글을 본, 당시 일본 굮史의 제1인자였던 모리오 까다모츠는 “장흥에서 陸羽식 다병을 발견한 일은 특필대서해야 할 일”이라고 그의 유명한 『茶經評釋』의 머리말에 적고 있다.

여기에서 밝혀둬야 할 일은 왜 저들이 깜짝 놀란 것일까 하는 점이다. 일반적으로 일본에 차가 들어와 보급되기 시작한 것은 12세기의 후반이었다. 당시 중국(송)의 음다법은 점다법이었다. 점다법은 쉽게 말하면 오늘날 말차(가루차)를 마시는 방법과 비슷하다. 따라서 19~20세기 초 일본에서 활동한 일본의 다인들은 단차를 본적이 없었던 것이다. 오직 육우의 『다경』을 비롯한 책에서만 읽었던 단차가 식민지 한국에선 상용되고 있으니 한편 놀라면서 다른 한편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음에 틀림없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1937년 7월, 목포부윤을 대동하고 장흥 현지를 방문한 이나바는 경성으로 돌아가 경성중앙방송국에서 ‘조선의 차’라는 제목으로 방송하면서 ‘전차’라는 본래의 이름이 있음을 알고서도 파란 곰팡이가 낀 것을 강조해 ‘청태전’이라 부르게 된 것으로 믿어진다.

이와 같은 사실은 그 후 장흥을 비롯한 서남부지방을 샅샅이 뒤지면서 조선차를 조사한 이에이리와 모로오가의 조사에 응한 수많은 조선인 가운데 어느 누구도 ‘청태전’이라는 단어를 입 밖에 내놓은 적이 없다는 사실에서도 미뤄 짐작할 수 있다. 들은 적이 없으니 어이 입 밖에 내놓을 수 있겠는가.

딱한 일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이렇게 전거 없이 일본인에 의해서 일부러 왜곡시킨 이름을 요즘도 그대로 쓰고 있다는 사실이다. 더구나 학계의 일각에서마저 말이다.

박광순 전남대 명예교수ㆍ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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