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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류 문학과 동일한 문학성 요구하기보다 전복적 가능성 인정하자”
“주류 문학과 동일한 문학성 요구하기보다 전복적 가능성 인정하자”
  • 정재림 고려대 한국어문교육연구소 연구교수
  • 승인 2011.09.19 1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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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타지 문학, 어떻게 볼 것인가

정재림 고려대 한국어문교육연구소 연구교수
영화「해리포터」시리즈가 10여 년의 대장정을 마쳤다. 이 십년이란 기간은 판타지를 새롭게 이해할 수 있는 시간이기도 했다. 과연 판타지 소설에도 문학성이란 고유한 가치가 존재할까라는 질문을 던져볼 수 있다. 판타지가 주변적인 장르가 아니라, 세대를 막론하고 빠져드는 요인을 갖고 있다면 이 힘은 도대체 무엇이라 명명할 수 있을까. 판타지 문학을 천착해온 정재림 고려대 연구교수의 진단을 따라가본다.

‘판타지와 SF, 마술적 리얼리즘, 우화화, 초현실주의 등의 사실적이지 않은 인간 표현의 모든 형태를 일컫는 일반적인 개념 및 용어’—『판타지 백과사전』 중 ‘판타지’항목

2019년 로스엔젤레스를 배경으로 어둡고 음울한 도시경관이 펼쳐진다. 몇 백 층은 될 듯한 고층빌딩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고, 공기오염과 오존층 파괴로 산성비가 계속 내리고 있다. 빌딩에 설치된 전광판과 곳곳에서 울려 퍼지는 스피커에서는 우주 식민지로의 이주를 소개하는 광고가 흘러나온다. 우주 식민지에서는 오염된 지구에서의 삶과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멋지고 쾌적한 삶이 준비돼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맞춤형 복제인간’이 새로운 생활의 정착을 전적으로 도울 것이라고 광고는 설명해 준다. 그러니까 2019년은 인간의 우주정복 및 식민지화가 가능해진 시점, 인간의 일을 대신해 줄 기계인간이 탄생한 시점인 것이다.

2019년 로스엔젤레스, 이것은 SF영화의 고전으로 꼽히는 「블레이드 러너」의 배경이다. 「블레이드 러너」가 영화라는 사실을 상기하면, ‘2019년’이라는 시간이나 ‘로스엔젤레스’라는 공간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영화에서 설정된 배경은 실제의 시간과 공간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장치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영화에 등장하는 구체적 시공간이 정말 의미하는 것은 ‘지금’과 ‘여기’가 아닌 어떤 곳이라는 지시성일 뿐이다. 이 영화에는 놀라운 성능을 자랑하는 복제인간들이 등장한다. 암살용, 위로용, 작업용으로 맞춤 제작된 복제인간의 존재가, 영화가 만들어진 1980년대 초반에는 정말 상상 속에서만 가능했을 듯하다. 하지만 의학과 과학의 놀라운 발달은 영화 속 환상을 곧 현실화시킬 듯하다. 현실의 결핍은 환상을 꿈꾸게 하고, 시간이 지나면 환상은 현실로 실현된다. 인류문명은 환상의 현실화 과정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점에서 문학과 예술은 인류의 문명화 과정에 간접적으로, 역설적으로 가장 능동적으로 참여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문학과 예술 장르는 기본적으로 환상에 기반을 두기 때문이다.

‘해리포터 신드롬’이 남긴 것

얼마 전 「해리포터와 죽음의 성물2」로 ‘해리포터’의 10년 대장정이 종료됐다. 10년 전 해리포터 첫 시리지에 등장하던 어린 주인공들도 어엿한 어른이 됐고, 열광적 독자였던 어린 독자들도 아마 함께 성장했을 것이다. 비판적인 목소리도 많았지만 해리포터 시리즈가 대중문화 역사의 신기록들을 세웠다는 사실을 부인하기는 어려울 듯하다. 전세계의 언어로 번역돼 4억부 이상이 팔렸다고 하니 조안 롤링은 어느 작가와도 비교가 되지 않을 베스트셀러 작가다. 게다가 해리포터 시리즈는 단순히 종이책으로만 출판된 것이 아니라, 영화, 장난감, 게임 등으로 재탄생했으니 ‘해리포터 신드롬’이라는 말이 허언이 아니다.

하지만 해리포터 시리즈 독자의 열광을 문학 자체에 대한 관심으로 해석하기는 어려울 듯하다. 해리포터 현상에 비판적인 입장을 보이는 비평가들의 말대로, 해리포터 열풍은 자본주의 마케팅 전략이 만들어낸 결과물이라고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독자와 관객의 관심이 10년 넘도록 유지됐다는 것은 이 신드롬을 단순히 마케팅 전략의 결과라고 폄하하기를 주저하게 한다. 적극적 독서와 구매행위를 가능하게 할 만한 힘이 이야기 속에 존재한다고 봐야 하며, 그 힘은 ‘환상성’에서 비롯됐다고 할 수 있다.

물론 ‘환상성’은 문학의 고유하고 대표적인 특성 가운데 하나다. 죽은 여자와의 기이한 만남을 소재로 한 『금오신화』의 이야기도, 꿈속에서 세속적 성공을 실현하는 『구운몽』도 환상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환상이라는 장치 없이는 존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블레이드 러너」, 「매트릭스」등의 SF영화 역시 과학적 상상력과 결합한 환상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옛날이야기에 나오는 환상과 요즘 문학이나 영화에 등장하는 환상이 외적으로 다르긴 하지만 그것이 본질적으로 다르지는 않은 듯하다. 고전문학 속의 환상이든, 요즘 문학에 나오는 환상이든‘지금-여기’에 존재하는 않는 가상의 것이라는 속성을 공유하기 때문이다. 물론 최근 문학이나 영화에 등장하는 환상성이 감각적 심상들을 동원하며 더 리얼한 재현방식을 갖게 됐다는 차이를 보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렇다면 문학적 기법으로서든, 장르로서든 환상성(판타지)이 시대를 초월해 대중의 주목을 받아온 이유는 무엇일까. 그 원인에 대한 해명을 둘러싼 견해는 크게 둘로 갈린다. 첫째, 비판적 입장을 취하는 경우다. 이들이 주목하는 것은 판타지의 퇴영성이다. 환상이 냉엄하고 치열한 현실 논리를 직시하지 못하게 만드는 역할을 수행한다는 것이다. 가령, 달콤한 환상으로 버무려진 하이틴 로맨스류의 소설은 냉혹한 연애의 현실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다. 여성 주인공이 가난해도, 설사 아름답지 않아도, 혹은 사회적으로 내세울 만한 장점이 전혀 없더라도 그녀는, 완벽한 조건을 갖춘 백마 탄 왕자님을 만나게 마련이다.

때문에 판타지의 퇴영성에 주목하는 비평가들은 판타지 장르의 확산과 유행을 반가워하지 않는다. 이러한 현상이 현실 정치나 사회에 대한 무관심에서 비롯된 것일 뿐만 아니라, 더욱 염려스러운 부분은 다시금 정치사회에 대한 무관심을 재생산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둘째, 판타지 장르에 잠재된 혁명성, 전복성에 주목하는 견해다. 대표적인 이론가로 『환상성』의 저자 로즈메리 잭슨을 들 수 있다. 그녀는 환상에는 “예술적 재현 행위의 ‘규칙들’을 교란시키고 ‘사실적인’것의 문학적 재생산을 방해”하는 기능이 있다고 지적한다. 물론 모든 판타지 장르가 잭슨이 말한 환상의 기능들을 완벽하게 수행하고 있는지는 의심스럽다. 하지만 환상이 실제 현실과 다른 것을 상상하게 하는 힘이며, 환상이 현실에 대한 부정성을 내포하고 있는 것만은 확실해 보인다.

현실세계의 허구성 드러내는 장르적 특성

『반지의 제왕』의 저자 J.R.R 톨킨
『해리포터』의 롤링이나『반지의 제왕』의 톨킨만큼은 아니지만, 한국에도 유명한 판타지 작가들이 많다. 『드래곤 라자』의 이영도, 『전나무와 매』의 전민희, 『더 로그』의 홍정훈 등이 대표적인 작가들이다. 이들 판타지 소설의 독서 시장 점유율은 이른바 주류 문학의 그것과는 비교되지 않을 정도이다. 하지만 판타지 문학이 성행하기 시작하던 1990년 초반이나 지금이나 주류문학 진영은 판타지 문학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분위기다. 즉, 저급한 대중문학으로 폄하하거나 아예 문학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주류문학의 경계 확장에 관심을 갖고 있는 일부 연구자들의 경우, 하위 장르로서의 판타지 문학을 주류 문학 내부로 수용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연구자들의 경우는 판타지 장르의 문학성을 인정하는 것 같지는 않다. 서적 판매량이나 인터넷 조회수가 판타지 문학의 문학성과는 무관하다고 보는 것이다. 오히려 판타지의 인기가 ‘나쁜’현실을 망각하게 하고 망상이 주는 달콤함에 젖어들게 하는 데서 비롯된다고 비판하곤 한
다.

그러나 주류 문학/판타지 문학과 문학성/비문학성을 일대일로 연결 짓는 것이 생산적 논의를 만들지 못한다는 점을 유념할 필요가 있을 듯하다. 또한 주류 문학과 동일한 문학성을 요구하는 것도 오만한 태도일 수 있다. 리얼리티라고 믿고 있는 현실세계의 부정성 혹은 허구성을 드러내는 데에 판타지의 혁명적 전복성이 존재함을 인정하는 태도, 판타지 장르만의 ‘문학성’이 만들어지기를 기다리는 태도가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정재림 고려대 한국어문교육연구소 연구교수
고려대에서 국어국문학으로 박사를 받았다. 문학평론가로도 활동하고 있으며 대표 저서로는 『기억의 고고학』, 『 문학의 공명』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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