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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 김용준 교수의 내가 본 함석헌①
[기획연재] 김용준 교수의 내가 본 함석헌①
  • 교수신문
  • 승인 2002.06.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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풋나기 스무살에 만난 청천벽력의 메세지 역사의식 일깨워

六臣의, 말을 뛰어넘은 이 비장한 사실을 한국 사람인 다음에는 반드시 알 필요가 있다. 차라리 셰익스피어를 못 읽고 괴테를 몰라도 이것은 알아야 한다. 여기서 우리는 고난 중에도 살아 있는 한 얼을 보기 때문이다. 겉에 말라붙은 더께와 썩은 살을 헤치고 오히려 뜨거운 피, 뛰는 생살의 만짐이요, 풍화 부식된 지각을 뚫고 들어가 白熱의 地心을 엿보기 때문이다. 불의가 주는 녹은 입에 넣을 수 없다하여 한 알을 다치지 않고 곳간에 쌓아 두었으며, 승지의 안방에 거적자리 하나밖에 없었으니, 이것이 한 얼의 맑음이 아니며, 부젓가락으로 다리를 뚫고 배꼽을 쑤시며, 칼로 팔을 끊어도 낯빛이 까딱없었으니, 이것이 한 얼의 거셈이 아니냐? 마음이 바다같이 너그러우니 그 모진 형별도 허허 웃으며 당하였고 혼이 금보다 더 참되고 정성이 불보다 더 뜨거웠으니 나를 죽이는 사람보고도 “나으리가 선조의 이름있는 선비를 다죽이어 이 한 사람이 남았고 사실 이 謀計에는 참여치 않았으니 두어 두고 쓰시오, 이는 참 어진 사람이오.”하고 알뜰하게 권하였다. 조선 사람이 아무리 약해졌다기로 내 살을 지지는 무사를 보고 “鐵片이 식었구나. 다시 달구어 오너라”하는 그 혼이 제 속에 들어 있음을 안 다음에 근심할 것이 무엇이며, 조선 사람이 아무리 비겁해졌다기로서 내 등껍질을 산 채로 세워 놓고 벗기는 귀신을 향하여 “내가 한 자루 칼을 가지고 자네를 내쫓고 내 옛 님을 도로 모시려다가 불행히 간사한 놈이 일러바쳐 버렸으니 다시 무엇을 할꼬?” “연회하는 그 날 내가 칼을 쓰겠다는 것을 너희 놈들이 萬全之計가 아니라 하여 못하게 하여 오늘날의 화를 만들었으니…짐승과 다름이 무엇이냐? 다시 물을 것이 있거던 저 선비 아이들한테나 물어라”하는 기개가 자기 안에 있음을 안 다음에야 두려워할 것이 무엇일까? 5천년 역사에 이 한 구절이 없으면 빛이 한층 떨리는 일이요, 5백년 부끄러움의 시대에서도 이 한 사실이 있으면 다 갚고도 남을 수가 있다. 육신은 우리를 위해 만장의 기염을 토하는 산 영들이다.

함석헌 선생님의 수많은 저서와 글 가운데서 무어니 무어니해도 으뜸가는 저서는 ‘뜻으로 본 한국역사’다. 이 저서의 전신은 ‘聖書的 立場에서 본 조선역사’다. “본래 이것은 나 홀로의 한숨이며 돌아봄이요 알아주는 친구에게 하는 위로요 권면이다. 우리의 기도요 믿음이지 역사연구가 아니다”라고 본인 스스로 1950년 3월 28일자로 발행된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의 서문에서 밝히고 있다.

회색두루마기 수염난 할아버지

내 나이의 사람들은 정식으로 학교 교단에서 우리나라 역사를 배우지 못한 세대들이다. 일본어로 일본역사를 공부하며 대학입학시험 준비를 한 일제 식민지시대의 소생들이다. 내가 함석헌 선생님을 처음 뵌 것은, 이미 지난번 지면을 통해 소개된 바와 같이 1949년 봄의 어느 일요일 오후였다. 종로 YMCA 옛날의 목조건물 앞에 ‘성서강해 함석헌’이라고 요새 식으로 말하면 A4용지 크기의 광고문을 보고 삐거덕거리는 계단을 올라가 2층 강당의 뒷좌석에 앉았다. 해사하게 밝은 봄날의 햇빛아래 있다가 별안간 옥내로 들어가니 처음에는 눈이 어두침침하다가 한참 있다가 차츰 사물이 분간되기 시작하면서 회색 두루마기에 수염이 난 할아버지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지금 생각하면 당시 49대의 장년 함석헌이었지만 20세 갓 넘은 젊은이에게는 할아버지로 비쳤던 것이다. 그날 선생님이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는 생각이 나지 않지만, 강해가 끝난 다음 집으로 돌아가면서 한국에도 페스탈로찌와 같은 저런 분이 계셨구나 하고 독백했던 기억은 분명하게 남아있다.

한국사의 주제는 ‘고난의 역사’

기독교 용어를 빌린다면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교회를 다녔던 이른바 모태신앙이요, 8·15 해방을 맞이하면서 소위 사회주의의 물결에 흠뻑 젖었다가 국립서울대학교안 반대 투쟁위원으로 옥살이까지 경험했던 아직 풋내나는 학부 2학년생에게는 낯설은 할아버지의 성서강해는 그야말로 청천벽력과도 같은 새로운 메시지가 아닐 수 없었다. 그 일요일부터 매주 일요일 오후 두 시 선생님의 성서강해를 듣는 일은 나에게는 빼놓을 수 없는 週間 행사가 되고 말았다. 매 주말이면 천안 부모님 댁에 내려가서 보급을 받아다가 한 주일을 생활하고 있었던 때였지만 그 후부터는 이 성서 집회 때문에 고향인 천안에 내려가는 일은 되도록 동생들에게 맡기는 일이 잦아졌고 부득이 내가 내려가야 할 때라도 어떻게 해서라도 이 집회의 시간에는 늦지 않게 상경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앞에서 소개한 선생님의 ‘머리말’의 말미에 기록돼 있는 일자가 1950년 3월 28일로 되어 있는 것으로 미루어, 내가 성서집회에서 7백부 한정판으로 출판된 노란 표지의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라는 책을 손에 넣은 것은 1950년 4월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이미 앞에서 밝힌 대로 우리나라 역사란 한번도 정식으로 배워보지 못했던 내가 현재까지도 제대로 읽어본 우리나라 역사책이란 선생님의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 밖에는 없다. 그리고 선생님의 역사책이라고 하면 지금도 제일 먼저 떠오르는 대목이 바로, ‘죽어야 하는 사람들’이라는 소제목 하에 기술되어 있는 부끄러운 이조 5백년 역사의 사육신의 이야기다. “내 나라를 버리고 모른다고 할 수는 없지, 잘났거나 못났거나, 영광이거나 부끄러움이거나 사실을 사실이라 아니할 수 없지, 꾸부리고 거짓 꾸밀 수도 없지, 살 수 있는 날이 오겠지, 이 세 가지 작대기 같은 생각 ‘믿자는 의지, 나라에 대한 사랑과 과학적이려는 양심’을 가리킴으로 천막을 버티고 그칠 것 같지도 않은 일제시대의 폭풍우를 견디며 그 밑에서 어린 마음들에게 씨를 넣어 주자는” 생각에 일제시대에 우리나라 역사를 엮어가고 있을 때 “천막 속에서 임금의 아들을 배는 거러지 처녀 모양으로 그러는 동안에 까닭을 설명할 수 없이 내 마음 속에 들어온 것이 이 고난의 역사라는 생각이었다”라고 ‘넷째판에 부치는 말’에서 저자 스스로 밝히고 있듯 함석헌은 우리나라의 역사의 주제를 ‘고난의 역사’라고 이해하고 있다. 그리고 고난의 역사는 ‘고구려의 죽음’에서 정점을 이룬다.

함석헌 선생님은 “낙랑을 도로 찾느라고 그 손은 이미 다쳤고 선비·모용의 포악한 대적을 막느라고 그 다리는 벌써 상하였고 수·당의 흉악한 도둑을 용하게 물리치기는 하였으나 그로 인하여 가슴팍에 찔림을 입은 다음에는 신라가 염치없이 다시금 당나라를 이끌어들여 앞뒤로 들이치는데 그 고구려도 견딜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민족통일의 제일 첫째의 자격자인 고구려는 하다하다 못해 제 비통한 주검을 전선 위에 가로 놓은 것으로서 겨레에 대한 마지막 공헌으로 삼고 갔다”라고 고구려의 죽음을 애도한다. 신라의 통일은 淸川江 이북을 가보지 못한 통일이다. 통일이 아니요 腰折이라고 울부짖는다.

그는 이조 5백년은 한마디로 ‘中軸이 부러진 역사’라고 정의를 내린다. 그리고 受難의 시대라고 말하고 있다. “무엇 때문에 수난인가? 두말 할 것 없이 그 다하지 못한 책임 때문이요 그 잃어버린 정신 때문이다. 이조 한 代의 역사는 한 마디로 말하면 중축이 부러진 역사다… 중축없는 바퀴를 밀면 밀수록 더 어지러히 이리 굴고 저리 굴듯이 역사도 정신이 빠지면 아무리 정치를 하고 모든 문화 활동을 하여도 어지러울 뿐이다. 그러므로 수난”인 것이다. 세계역사를 통해 15세기부터 5백년 동안이 가장 변화가 많았던 시기인데 그 5백년간을 한 왕조가 쇄국정책 하에 은둔하고 있었던 나라에 무엇이 볼 것이 있겠느냐 라고 한국을 비판하면서 끝까지 한국방문을 거부한 토인비의 말대로 그야말로 중축이 부러진 이씨 조선은 결국 망국의 한을 안고 일제의 식민지로 그 막을 내리고 말지 않았던가.

6·25 동란 일주일 전의 예언

나라 꼴이 이럴 수가 있는 것이냐? 지금 이 밑에서는 화산의 불길이 이글 이글 타오르고 있는데 그 분출구 위에 살짝 덮혀있는 얇은 암반이 마치 만세반석이나 되는 양, 이렇게 까불고 있는 이 나라는 장차 어찌 될 것인가라는 요지의 말씀을 가슴에 새기고 집에 돌아온 지 일주일 후에 6·25 동란이 터지고 말았다. 1950년 6월 18일 성서모임에서 하신 선생님의 말씀을 6·25 사변을 치루면서 구약성경에 기록되고 있는 예언자들의 부르짖음도 마치 이와 같았던 것이 아니었을까하는 생각을 지금껏 되씹고 있다. 6·25사변 발발전 일주일 전에 하신 선생님의 예언대로 이 나라는 그야말로 화산의 분출로 또 한번의 민족 재난을 경험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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