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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동의 시대 상처 아로 새긴 '삐라의 수사학'
격동의 시대 상처 아로 새긴 '삐라의 수사학'
  • 정선태 국민대 교수
  • 승인 2011.09.06 09:4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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텍스트로 읽는 책갈피_『'삐라'로 듣는 해방직후의 목소리』

그렇다면 전단지를 통해 드러나는 정당, 단체, 위원회, 개인들의 목소리의 양상은 어떠할까. '취지서'나 '선언'은 그렇다 치더라도, '격' '격문''급고''警報' 등등의 표제를 앞세운 수많은 전단지들이 전하는 목소리는 해방공간이라는 역사적 상황 속에서 갈등과 대립이 얼마나 심각했는지를 여실하게 보여준다. 자신의 의견을 낮은 목소리로 일관성 있게 피력하기보다는 상대방의 주장을 반박하고 비난하면서 자신의 입장을 강화하려는 선동적인 修辭가 지배적이다. 이것을 이를테면 '삐라의 수사학'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예컨대 '자살동맹'이라는 섬뜩한 이름의 단체에서 배포한 전단지의 표제는 '오냐!!! 싸우자!! 올 것은 기어코 왔다!'이다. 이처럼 마주보고 달리는 기차와 같은 형세로 상대방을 압도하려는 언어가 전단지를 가득 메우고 있다. 논란이 많았던 쟁점과 사건 가운데 친일파 문제와 신탁통치 문제를 예로 들어 보기로 한다.
아직도 정리되지 않은 문제이긴 하지만 이 시기 가장 뜨거운 논쟁거리 중 하나는 이른바 '친일파' 또는 '附日協力者'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를 문제였다.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고 새롭게 자주독립국가를 건설하는 것이 지상명제라는 좌익측의 주장과 위기를 돌파하기 위해서는 과거에 얽매이지 말고 '일치단결'해야 한다는 우익측의 주장이 평행선을 그으면서 친일파 처리 문제는 한 마디로 요약하기 어려운 난맥상을 드러낸다.

좌우를 막론하고 이들의 언어는 격렬하다. 이것을 앞서 말했듯 '삐라의 수사학' 또는 '선전선종의 언어'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증오와 원한으로 가득한, 그리고 각각의 정치적 이해관계를 분명하게 보여주는 이러한 '날것' 그대로의 언어는 서로의 소통가능성을 원천적으로 봉쇄해버린다는 점에서 해방 공간에서 한국전쟁으로 이어지는 비극적 현대사를 예고하는 불길한 징후로 읽어야 할 것이다. 선명성을 강조하다보니 결국 한쪽이 던진 저주의 언어가 그대로 부메랑이 돼 되돌아오는 모양새다.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고, 합리적 방법을 모색하려는 시도를 찾기란 참으로 어렵다. 그만큼 숨을 고르고 차근차근 말하기가 힘들었던 시대였기 때문일까. 아니면 각자의 정치적 욕망을 거친 언어로 감추려 했기 때문일까.

이러한 '삐라의 수사학'은 '민족반역자 논란'뿐만 아니라 일련의 정치적 일정과 연합군환영대회, 각종 기념식 등등을 빌미로 전방위적으로 동원된다. 예컨대 다음과 같다.

"그렇다! 불세출의 야심가이며 전형적 영웅주의의 權化인 여운형 일파의 위조지폐인 '인민공화국'이야말로 8월 15일 이후의 우리 민족 진영을 분열시킨 원흉이며 건국촉성운동을 멸렬화시킨 장본인이다! 그들은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전면적으로 부인하며 그들의 환국조차 갖은 악랄한 수단으로 방해하고 있다.(대한청년의혈당, 「반동적 언론기관을 분쇄하자!」, 1945.11.24)"

"진정한 애국자는 모조리 체포 감금하고 암흑천지로 변하는 남선에 소위 大韓獨促이란 허울 좋은 간판 아래 친일 주구들이 모여서 謀利할 공론만 하는 놈들의 소행은 이 다음 제일 먼저 처단할 테지만 우리는 여기에 유인당해서는 절대로 조선 민족 아니올시다! (발행자 및 발행일 미상, 「동포에게 격함」)

이처럼 언어는 소통이라는 본래의 기능을 상실한 채 '적'을 향한 대답 없는 외침으로 전락하고 만다. '원흉', '악랄', '앞잡이', '개나 도야지', '철퇴', '처단' 등등 상대방의 의미 있는 반론을 차단해 버리는 표현들이 난무한다. 그리고 급기야는 암살과 테러를 통해 상대방을 '박멸'해버리자는 주장으로 나아간다.

그 어디에서도 "통일된 부강하고 자유로운 인민의 나라"를 세우기 위해 좌우가 머리를 맞대고 熟議하는 장면은 찾아보기 힘들다. 물론 좌우합작이나 통일정당결성 나아가 남북협상에 이르기까지 대화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는 있었으나 번번이 좌절되고 말았다. 이것을 과연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제국주의 일본의 지배 아래 억압당했던 언론?집회?결사의 자유가 한 순간 황홀하게 꽃을 피우는 듯했다. 그러나 서로의 이해관계와 정치적 이념에 긴박된 세력들의 암투가 전면화하면서 그리고 한반도를 둘러싼 미국과 소련의 전략이 본격적으로 가동하면서 그 꽃은 허무하게 시들고 말았다. 그 한복판에서 전단지에서 읽을 수 있는, 서로를 적으로 돌리고 응징하기에 급급한 '삐라의 수사학'이 자리잡고 있다. '삐라'가 한반도 현대사의 불길한 징후를 보여준 상징적 텍스트라고 말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 이 글은 이 책의 공동 편저자인 정선태 국민대 교수의 해제 「해방직후의 전단지, '불길한 아우성'의 흔적」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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